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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써야하는 심정이 너무나 참담하다. 물론 본인이나 그의 가족의 고통에 비하면 나의 참담함은 비할 바가 아님을 잘 안다. 하지만 이 땅에서 딸 자식을 키워야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번 나영이 사건은 나를 다시 한번 주저앉힌다. 가슴이 '덜덜' 떨려온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무릎 정강이를 호되게 걷어차인 것 같은 분노와 고통이다.

내 딸도 8살이다. '나영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의 나이와 같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아침마다 혼자 초등학교에 걸어간다. 입학한 뒤 한 달 동안은 남편과 내가 교대로 함께 동행해주었다. 아이가 길을 잃어버릴까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마 모든 부모들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아이에게 늘 주문처럼 외우게하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와도 절대 따라가지 말 것, 좁고 구석진 길로 다니지 말고 큰 길로 다닐 것, 무슨 일이 있으면 수신부담 전화로 전화할 것. 하지만 일터에 있는 나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하다. 딸아이를 키우려니 정말 새가슴이 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수록 강심장으로 키워야한다. 현실은 그렇게되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대범한 모성을 허락하기엔 너무나 잔인한 세상

2007년 12월 25일 안양시 안양8동 집 근처에서 실종·납치됐던 고 우예슬양의 근조 화환.
 2007년 12월 25일 안양시 안양8동 집 근처에서 실종·납치됐던 고 우예슬양의 근조 화환.
ⓒ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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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등교시간보다 더 불안한 때는 하교시간이다. 떠들썩한 등교시간에 비해 하교시간은 그야말로 안전무방비 상태다. 아이들의 인적도 뜸하고 학교 측에서도 아이들의 안전귀가에는 그리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누가 말을 걸어와서 설령 아이를 데려간다해도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큰 길로 다닌다 해도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오는 오후 3시경, 하교하는 초등학생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걱정을 따지자면 등하교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불안의 대상이 된다. 요 근래, 딸 아이 둘이 놀이터에 다니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아파트 내 놀이터라고 해도 절대 안전지대가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감시요원(?)처럼 늘 따라다녀야 했다.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난 벤치에 앉아 책을 보는 척하면서 누가 아이들에게 접근하지는 안 하는지, 누가 이곳을 보고있지 않은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엄마가 곁에 있다는 걸 알면서 접근하는 바보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날마다 아이들을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 아이들도 이제는 제법 컸다고 올 여름부터는 내가 직장에 있을 때도 곧잘 놀이터에서 놀다가 오는 모양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듣고는 걱정이 됐지만, 지나친 모성이라고 생각하고 대범하게 생각하려 했다.

두 아이가 제법 많이 컸다고 대견해하기도 하고, 내가 너무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만들지 않는 모양이다. 대범한 모성을 허락하기엔 세상이 너무 잔인하고 야만스럽다.

"놀이터에 담배 피는 아저씨 있으면 그냥 와"

놀이터 어린이들
 놀이터 어린이들
ⓒ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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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도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놀이터같은 곳엔 가지 않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 발을 왼종일 묶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내 가슴은 새가슴이 되어가다 못해 가슴이 쪼들어 타들어갈 지경이다.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경계의 대상이다. 꾸부정한 할머니마저 의심스럽다. 또래의 친구들도 마음 놓을 수 없다. 놀이터에는 가되 경계의 대상을 정했다. 일단 놀이터에 아저씨가 있으면 무조건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아이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왜 아저씨가 놀이터에 있으면 집에 돌아와야 돼요?'
'남들 일하는 시간에 놀이터에 혼자있을 수 아저씨들은 많지 않거든. 더구나 혼자 담배를 피우거나 그런 아저씨라면 빨리 집으로 돌아와.'

내가 생각해도 지나친 오류다. 어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아이들이 평화롭게 등교하는 그 멀쩡한 아침에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너에게 해를 입힐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지 세세하게 설명한단 말인가. 엄마인 나도 모르는 것을. 신도 모른다. 겉으로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병든 사람들이 세상에는 허다하니까. '아동성폭행자'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지나치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는 중이다. 

엄마의 성급한 일반화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놀이터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선량한 아저씨들 입장에서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놀이터에서 담배도 못피우냐'고 따진다면 나도 할 말은 있다. 아이들의 공간인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체부터가 잘못된 발상이니까.

조씨의 12년형, 아동성폭력을 눈감아주는 행위

이번 나영이 사건의 조씨 12년형은 말이 안 되는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그냥 엉덩이 한 대 때려주고 훈방조치하는 것이나 같다. 한 마디로 그냥 눈감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이러한 판결을 내린 당사자의 딸이 그런 입장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잔인하지만 그런 가정을 해본다.

어째서 이 나라는 아동성폭력에 이리도 관대한지 모르겠다. 관대하다 못해 자비스럽기까지 하다. 쓸데없는 자비심에 관대함을 낭비하고 있다. 정작 써야할 관대함을 잘못된 방향으로 남용하고 있다.

12년이라는 형기나 제대로 채울 지 그것도 의문이다. 중간에 가석방이니 보석이니 그런 핑계로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이라면 애당초 그런 형식적인 판결은 거두는 게 낫다. 피의자의 신원공개가 적절한 처벌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원공개보다 더 무겁고 엄중한 처벌이 따라야한다.

그러한 처벌로 나영이 식구들이 받은 고통이 해소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전례를 남겨야 한다. 이 땅에 아동성폭행은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것임을. 그렇게 어정쩡한 판례는 또하나의 아동성폭력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아이들, 우리 모두의 손으로 지켜야

끝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행여 길을 오가다, 책가방을 메고 홀로 등교하거나 하교를 하는 초등학생을 주위에서 본다면 좀 더 따뜻하고 관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봐달라는 것이다.

다가가서 말을 걸라는 것이 아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거는 행위를 가장 경계하도록 아이들은 배웠다. 분위기를 파악해 달라는 것이다. 아이가 혹시 모르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누구에게 추궁당하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닌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한 동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 아이들을 모두의 손으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   


태그:#나영이 사건, #아동성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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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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