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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낭도로 편입되어 서라벌에 정착한 덕만.
 김유신의 낭도로 편입되어 서라벌에 정착한 덕만.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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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싸한 사극,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강보에 싸여 서라벌을 떠난 뒤로 중국 서북쪽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세계 각국 상인들과 뒤섞여 발랄한 '소녀시대'를 보내다가, 15년간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칠숙과의 만남을 계기로 양어머니 소화를 잃고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문노를 찾아 고국 신라를 찾아온 덕만(선덕여왕의 이름, 이요원 분).

그러나 꼭 찾고자 했던 문노는 만나지 못한 채, 덕만은 '엉뚱하게도' 김유신과 천명공주와 보종(미실과 설원랑의 아들) 등과 얽히고설키게 되면서 신라 왕실의 관심 속에 김유신의 용화향도에 편입되었다. 남장 여자인지라 낭도들 간의 서바이벌 달리기에서 늘 꼴찌일 수밖에 없었던 덕만은, 들판을 한 바퀴 돌아온 뒤에는 진흙투성이인 얼굴을 물속에 푹 담그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물속에 무슨 노화촉진제라도 탔는지, 물속에다 얼굴을 몇 번 헹구고 나니 소녀 덕만은 어느새 성인 덕만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제9회 이후의 드라마 <선덕여왕>은 성인이 된 덕만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사극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선덕여왕의 소녀시절에 관한 드라마 속 내용이 정말로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한 번씩은 다 품었을 것이다. <태왕사신기>나 <쾌도 홍길동>처럼 사실과 무관한 픽션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사극인 경우에는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겠지만, <이산>이나 <선덕여왕>처럼 실제 사실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연출하는 경우에는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때마다 "사극은 사극일 뿐, 오해하지는 말자!"라며 슬며시 피해나가는 방송 관계자들이 무책임하거나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드라마 <선덕여왕> 제8회까지 방영된 선덕여왕의 소녀시절은 과연 얼마나 사실에 부합했을까? 기존에 확립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이 점에 관해 어떤 정보를 알려주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는 선덕여왕의 소녀시절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말한다. 참고로, 본기(本紀)란 사마천의 <사기>로 대표되는 기전체 역사서에서 '제왕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부분'을 가리킨다.

"덕만의 성품은 관대하고 명민했다."(德曼性寬仁明敏)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 알 수 있는 등극 이전의 선덕여왕에 관한 정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기본 성격이 어떠했다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관대하고 명민했다'는 짤막한 한마디로 선덕여왕의 이미지를 정리하긴 했지만, 이 기록이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할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음미해볼 수 있다.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 지닌 고려 유학자들도 인정한 '통 큰' 여성 선덕여왕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속이 좁다'는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고려시대 유학자들에게도 선덕여왕이 관대한 인물로 인식되었다면, 실제 선덕여왕이 남자 대신들의 경탄을 살 만큼 통이 큰 여자로 비쳐졌고 또 그런 평가가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관대하고 명민했다는 점 외에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타난 선덕여왕의 또 다른 이미지는 '예지력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 사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소녀시절의 선덕여왕은 관대하고 명민하며 예지력이 탁월한 인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존 사료들과 비교할 때, 드라마 속 덕만의 특성인 '영리하고 대담함'은 실제 선덕여왕과 일치하지만 '악착하고 선머슴 같음'은 실제의 그와는 다소 거리를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위작 논란에 휩싸여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 역시 소녀시절의 선덕여왕에 관해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알려주고 있지는 않다. 현존 <화랑세기> 역시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으로 선덕여왕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 <화랑세기>의 제13세 풍월주 용춘공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덕공주가 점차 자라니,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외표(外表)가 왕을 이을 만했다."(善德公主漸長, 龍鳳之姿, 天日之表, 可以嗣王)

여기에 나타난 등극 이전 선덕여왕의 이미지는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의 외표 즉 군주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현존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면, 왕궁 내 아랫사람들이나 대신들을 대하는 선덕공주(덕만공주)의 모습에서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나 위엄 같은 것이 보였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위와 같이, 기존에 확립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든지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든지 간에 소녀시절의 선덕여왕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사료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선덕여왕에 관한 추상적인 이미지들뿐이다.

최초의 여성 군주이기 때문에 등극에 관한 기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남았을 법도 한데, 이처럼 등극 이전의 선덕여왕에 관한 기록은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강보에 싸인 덕만이 시녀 소화의 품에 안겨 중국 서북쪽으로 흘러갔다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찍고' 동쪽 신라로 되돌아왔다거나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우여곡절을 거쳐 김유신의 낭도로 편입되었다는 식의 드라마 속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증'이 아닌 '상상'에서 나온 이야기들인 셈이다.

이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등극 이전의 선덕여왕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으로부터 또 다른 중요한 점을 도출해낼 수 있다. 어떤 점일까?

별다른 이야기 없는 선덕여왕, 비교적 순탄하게 등극 이뤄졌을 가능성

일반적으로 볼 때,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등극한 군주의 경우에는 등극 이전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태종이나 세종의 등극 이전 행적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들이 원래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던 데에다가 그들의 등극이 정변 혹은 우여곡절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왕이 되지 않았을 사람들이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기록이 보다 더 자세히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역시 정상적인 경우라면 왕이 되기 힘든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고난의 과정을 거쳐 등극했는지에 관해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현존 <화랑세기>에서도 등극 이전의 선덕여왕에 관해 별다른 정보를 알려주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선덕여왕의 등극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요소 말고는 별달리 특기할 것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될 수 없었던 자가 왕위에 도전할 때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이라는 요소가 선덕여왕의 등극 이전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고난의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등극에 성공했다면, 그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선덕여왕의 생애에서 고난의 등극이라는 과정을 입증할 수 없다. 

이것은 선덕여왕의 등극이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드라마 속의 덕만은 출생 직후부터 '집 떠나 개고생'을 했지만, 실제의 소녀 덕만은 서라벌의 '집안에서 쿡' 박혀 별 무리 없이 공주 수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무려 53년간이나 왕위를 유지한 진평왕(재위 579~632년)의 권력기반이 비교적 안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힘이 없는 군주였다면, 당시 같은 세상에서 아들도 아닌 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편안히 눈을 감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무난하게 등극에 성공했다는 점은,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에 설명된 바와 같이 귀족세력으로 대표되는 국인(國人)들이 선덕을 옹립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왕권과 귀족권이 대립하던 당시의 정국구도 하에서 귀족세력이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남자도 아닌 여자 왕족을 왕으로 옹립했다는 사실은, 선덕여왕이 당시의 기득권층에게 특별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그의 등극 역시 별 무리 없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서라벌 왕궁에서 공주수업을 받던 선덕여왕은 아버지의 낙점과 귀족세력의 옹립이라는 과정을 거쳐 비교적 무난하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처럼 무난하게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역사 기록자들의 입장에서는 등극 이전의 선덕여왕에 관해 별로 기록할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제의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드라마 <선덕여왕>이 고난으로 가득 한 그의 소녀시절을 묘사하는 것은 선덕여왕을 보다 더 영웅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투쟁의 장(場)에서는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여성이 다수파인 남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왕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려면, 등극 이전 선덕여왕의 처지를 실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로 설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소녀시절 선덕여왕의 이미지는 비록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소수파인 여성이 남성 중심의 기존 체제 속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획득했는지에 관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선덕여왕은 단순히 여성정치인을 상징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소수파 정치세력'이라는 더 큰 것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 중심의 기득권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다수파의 횡포 속에서 힘없는 소수파가 자신들을 보호하면서 리더십을 획득한 과정을 음미해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진정한 관전 포인트일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덕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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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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