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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은 6월 항쟁 2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민주화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연세대 학생이던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원인이 돼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 선언으로 마무리돼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뤄졌다. 정부 차원의 기념식은 2007년 6월 10일 처음 열렸다.

 

인천지역에서 6월 항쟁은 부평역에서 시작됐다. 6월항쟁 22주년을 맞아 지난 6월 6일 권금혜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국장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기자주>

  

"전두환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호헌조치를 취하고 천주교에서 경찰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공개하자, 국민들은 많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진행됐고, 인천에서는 부평역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고 퇴근하는 시민들이 합세해 부평역에서 백마장 입구까지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다. 시위대는 부평공단을 돌아 청천동 대우자동차 인근까지 거리행진을 해 집회를 열었다.

 

퇴근하는 대우자동차와 공단의 노동자까지 합세해 시위대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려 호응해줬고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음료수와 빵을 전달해주기도 하고 박수를 쳐주기도 하면서 함께 했다."

 

현재 산곡3동에 거주하는 권금혜(49·사진)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국장의 87년 6월 항쟁 당시 부평역에서 벌어졌던 시위에 대한 증언이다. 권 사무국장은 10일 집회가 끝난 후에도 산발적인 시위가 새벽까지 진행됐으며, 이후에도 6월 18일까지는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집회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권 사무국장은 1980년 대학에 들어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했고, 학생운동을 했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인천 동구 화수동의 교회에서 의료협동조합 실무자로 일했다. 그러다 1986년에는 부평구 십정동의 어린이공부방에서 일하며 인근의 공장에서도 노동자로 일했다.

 

1986년 2월 2일 야당인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각 지역에서 '개헌 현판식'을 진행했다. 같은 해 5월 3일 인천 주안의 시민문화회관에서도 현판식이 진행됐고,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벌였는데 향후 '인천항쟁'으로 불렸다.

 

1986년 5월 3일은 '인천항쟁'

 

당시에는 경인지역의 노동자, 학생, 재야인사 등 사회운동세력들이 총집결했으며, 이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합의 개헌을 주장하는 군부권력과 야당뿐 아니라 미국이 여야의 타협을 강요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에 대해서도 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신민당의 대회는 결국 무산됐다.

 

권 사무국장은 이날 집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공장이 끝났을 때는 상황이 종료된 상태라 주안공단에 있는 친구 집에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새하얀 최루탄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권 사무국장은 "이날은 경찰병력에 의해 깨지고 해산된 집회였지만, 인천지역 최대 규모였다"며 "이후 인천지역 주요 운동 인사들은 구속되거나 수배상태라 한동안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당시 129명이 구속됐으며, 60여 명은 지명수배를 당한 상황이라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되기 전까지만 해도 앞에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6월 항쟁 시발점인 10일 이후부터 18일까지 계속된 부평역 인근의 시위에서 권 사무국장은 최루탄의 일종인 지랄탄을 처음 맞아봤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줬다.

 

"하루는 의료봉사를 위해 맨 앞에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는 나와 10여명을 향해 경찰 측에서 지랄탄을 쐈다. 지랄탄을 맞으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지고 구토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골목길로 도망가다 당구장이 있는 건물로 도망갔다. 그러나 그곳까지 지랄탄이 들어와 3명은 실신했고, 다시 내려가려다 기억을 잃었는데 깨보니 당구장 입구에서 게거품을 물고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이후 다시 부평시장 쪽으로 가보니 많은 시위대들이 경찰들과 옥신각신하고 있었고 주변 주민들이 도움을 주고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계속된 시위로 집에 가면 최루가스가 심할 텐데 이를 알면서도 부모님은 크게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그런 상황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18일은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고 인천에서도 전투경찰들의 방패에 장미꽃을 꽂아줬다. 이후 26일 부평로에서는 노동자, 시민, 학생 등 8000여 명이 참여한 평화대행진이 열리기도 했다.

 

6월 항쟁 이후 29일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뤄져 마무리됐다.

 

"민주화운동하다 다치거나 아픈 사람, 지원했으면"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많은 공장 현장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으며, 이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권 사무국장도 이때 현재의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 결성에 함께하고 각 병원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도록 지원했다.

 

1992년까지 보건의료노조 활동을 한 후에는 아이를 낳으며 쉬다가 2009년 1월부터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됐으나, 6월 항쟁 당시 다쳤던 발목의 통증이 재발하고 몸도 안 좋아져 그만두려고 하고 있다.

 

끝으로 권 사무국장은 6월 항쟁에 대한 느낌과 소망 등을 이야기했다.

 

"6월 항쟁 당시에는 내가 꿈꾸는 세상으로 뭔가 바꿔낼 수 있겠구나, 그날이 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위 현장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밀어내 기분이 정말 좋아 춤추면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지금을 6월 항쟁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탄핵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6월 항쟁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한두 군데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고,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 상담치료를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원해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http://bpnews.kr)에도 실린 내용입니다.


태그:#6월항쟁, #인천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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