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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 기억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미래는 오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균형이 무너졌다. 합리적 비판과 공정한 평가는 공중으로 사라졌다. 찬사와 미화만 남아 춤춘다. 사자에 대한 충성서약이 유행이다. 찬양이 홍수를 이루고, '미처 지켜주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반성문이 산처럼 쌓이고 있다.

 

자살했지만 자살이라 부르지 못한다. 웬만한 용기로는 어림도 없다. 자살한 원인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한다. 추문은 간데 없고 순교자만 남았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시작된 추모 열풍은 새로운 신화를 써가는 중이다. 우상 하나가 부엉이바위 위에 우뚝 서고 있다.

 

이의제기나 분위기 환기를 위한 노력, 비판 시도도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잡놈'(이른바 '듣보잡'놀이)의 망언으로 비하된다. 사자 앞에서도 경건함을 모르는 망나니 취급이다. 정몽헌등의 죽음 앞에 지금처럼 경건하게 굴었는지에 대한 정당한 이의제기는 비웃음으로 돌아올 뿐 대답이 없다. 왜 답을 하지 않을까.

 

아무도 그가 거둔 최종적인 실패와 자멸로 치달은 과오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주검을 앞에 뒀지만 '죽음'은 사라졌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처럼 잠깐사이 모든 나쁜 기억을 지워버렸거나 잊은척 연극을 하고 있다. 이제 급기야 그를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치켜세우는데까지 갔고, 제 2의 노무현을 찾아야 한다는 아우성소리도 들린다.

 

불편하다. 이 불편함이 나를 깨워 이 글을 쓰도록 자극하고 있다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말은 '지못미'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데, 이런 의식의 전도에 놀란다.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주는게 정상이고, 그 반대는 코메디다. 유서에서까지 그 존재를 무시당한 국민은 그러나  자청해서 스스로를 비난하느라 여념이 없다. 기막힌 광경이다. 그래서 불편하다.

 

이 글은 주로 노무현을 좋게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내용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떨치고 싶은 나쁜 기억들을 기를 쓰고 환기시킬 것이며, 바로 그 나쁜 기억들이 노무현과 그 세력의 본질적인 성격을 대변하고 있음을 아프게 깨우치도록 끊임없이 자극할 작정이다. 

 

노무현 집권기와 정권이행기, 그리고 이명박 집권 초기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담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김대중 정권과의 비교와 대조를 시도할 것이다. 이런 평가와 비교를 바탕으로 우리가 꿈꿔야 할 진정한 민주적 리더십의 전형에 대해 논해 보려고 한다. 다시 무너지지 않을 든든한 기반에 대해 모색하러 나서는 길이다.

 

2. '노무현 탓' vs '조중동 탓'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은 최고의 유행어였다.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라 모두들 기억하고 있으려니 했는데, 지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대신 '노무현'의 자리에 '이명박'이 대신 들어 앉아 있다. 아이러니다. '오직 이명박'에서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로 유행이 옮겨 앉는데 걸린 시간은 채 1년이 필요하지 않았다. 2년 사이에 벌어진 극적인 변화는 다시한번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이게 다 조중동 탓이다.'라는 말이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 두 목소리는 서로의 메아리처럼 쌍을 이루어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를 퇴화시켰다. 한쪽에서 노무현을 말하면 바로 동시에 조중동 탓이 나왔고, 거꾸로 조중동을 말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노무현과 노빠를 말하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야무지게 판을 벌이며 사회적 퇴행을 완성시켰다.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심신은 피곤에 절었고, 극심한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사회적 스트레스가 개인을 압도했다. 저항할 수 없는 압력 속에서 사람들은 왜소해져 갔다. 각자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괴로움과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어 갔다. 날을 세울 일이 아닌데서도 날을 세우느라 지쳐갔다. 분규의 지절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양분극화 하는 동안 중립지대는 소멸했다. 편들지 않는 합리적인 목소리는 급속히 세를 잃더니 끝내 사회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혼란이 주는 스트레스는 '공정'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느쪽이건 '세력에 가담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균형은 제거당했다.

 

이 불필요한 소모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는 범우파의 몫이었다. 그들은 혼란을 조직화시켜 불만으로 재규합해 냈다. 그렇게 형성된 불만세력을 유혹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사회는 급격하게 우경화했고, 정치여론은 뿌리를 잃고 떠돌았다. 이 정치적 유동성은 이곳 저곳에 치유하기 어려운 정치적 거품을 만들어 냈다. 예측가능성은 낮아지고 불안은 확대됐다.

 

희대의 승부사라고 자임하던 노무현은 최종적으로 패배해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는 신세가 되었다. 오판과 오류로 점철된 그의 정치적 선택들에 따른 최종적 파국이었다.

 

민주화세력은 와해되었다. 민주화세력의 핵심인 민주당은 야당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부정당할 정도로 몰락했다. 집권당과 비합리주의 세력의 전횡에도 아무런 견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 집권 가능한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로 남았다.

 

수십년의 공화국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세력균형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극악한 독재체제 아래에서도 유지되던 대안세력으로서의 지위도 상실하고 말았다. 노무현이 당선되던 당시만 해도 이런 변화가 발생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노무현정권 초반 한동안 죽음의 문턱만 넘지 않으려 죽을 애를 쓰던 한나라당은 극적으로 환생해 기적처럼 집권에 성공했고, 음지를 헤매던 뉴라이트는 과거를 잊고 화려하게 비상했다. 이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하고 물질적 기반을 교통하는 조중동과 기득권 연합, 영남패권체제는 존속을 넘어 바야흐로 새로운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3.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또다른 유행어가 만들어져 한나라당 집권하는데 견인차 노릇을 했다. 조중동의 애송시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뉴라이트가 입에 물고 사는 일용할 양식이다. 민주세력의 집권기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삭제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패도 아니고 '잃어버렸다.'니.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용어는 극히 부적절하다. 10년으로 묶이기에는 근본적으로 두 정권이 거둔 성과가 달랐다. 주체도, 성격도, 목표도, 지향도, 운용 패턴도 달랐던 이질적인 정권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성공했고, 노무현 정권은 실패하여 침몰했다.

 

무엇이 이처럼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을까? 정권의 성패를 갈라 놓은 비밀을 도대체 무엇일까?

 

민주화세력의 새로운 성공을 위해 반드시 연구해야 할 숙제다.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 살아날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이 글은 바로 이 숙제에 대한 하나의 답안이기도 하다.

 

4. 바람직한 민주적 리더십 정립을 위한 소고.

 

"1997년 12월말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3전4기 끝에 당선된 뒤 그의 핵심 측근인 박지원 특보가 연락을 해서 만났다. 당시 정치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1년여의 대선 공방전에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인사치레를 한 뒤 "<조선일보>에 가서 살았다"고 해명(?)했다. 노 전 대통령의 다른 점은 집권을 하기 위해서 비토세력과 어떻게든 사귀어보려는 몸짓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 <한겨레> 김효순 칼럼 가운데 일부

 

오랜동안 두 정권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일지를 두고 혼자 궁리해 오던 차에 이 칼럼을 읽고 무릎을 쳤다. 지금껏 품어왔던 의문을 풀어줄 열쇠를 찾았다고 느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차이, 그리고 그들이 이끈 정권의 본질적 차이를 밝혀줄 '원형'을 발견한 셈이다.

 

바람직한 민주적 리더십의 전형이 무엇일지에 대한 해답도 찾았다고 생각한다. 공존의 리더십이 그것이다.

 

김효순의 글은 노무현의 올곧음과 단호한 태도에 관해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독자들도 그 의도에 맞게 반응했으리라 본다. 그게 지금의 분위기와 어울리기도 하고.

 

하지만, 이 글에는 김효순이 의도하지 않은 비밀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노무현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김대중 정권이 성공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우리가 따를 모범이 무엇인지 등등이 줄줄이 흘러 나온다.

 

박지원이 대리한 김대중은 '조선일보'를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한 반면, 노무현은 조선일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나 너랑 상대 안해'. 유아스러운 발상이다. 여기에서 나올 수 있는 대처법이라고는 결국 '타도', '박멸', '척결', '근절', '적출', '절멸'이 될 수밖에 없고, 비타협적 투쟁만 유일한 길로 남는다.

 

언뜻 보기에 '악의 세력'을 상대로 할 때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처럼 비칠지 모르지만, 성숙하지 못한 자세다. '조선일보와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 피해는 누가 뒤집어 쓰게 되는가? 노무현인가? 그가 대변하는 세력인가? 바로 이점을 혼동하는게 노무현과 노빠의 맹점이자 미성숙의 증거가 되겠다.

 

상대 역시 그냥 앉아서 당할 수 없으므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막다른 골목에서의 목숨을 건 싸움. 순치와 동화의 길은 막혀버리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생사투로 변한 싸움에서 지게 될 경우에 입을 피해가 무엇인지 우리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노무현 자신은 목숨을 잃었고.

 

김대중은 '대처'했고, 노무현은 '싸웠'다. 김대중은 '변화'를 추구했고, 노무현은 '승리'만을 원했다. 김대중은 '정치'를 했고, 노무현은 '승부'를 벌였다. 바로 이 차이다.

 

이 '원형'의 흔적들은 곳곳에서 나타나 쉽게 확인해 볼 수 있게 한다.

덧붙이는 글 | 몇 회에 걸쳐 이어갈 예정입니다.


태그:#공존의 리더십, #배타의 리더십, #김대중, #노무현,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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