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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좀비 3인방의 무한도전

 

아시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출전하는 우리들이기에 현지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 걱정(?)이 엄청났다. 쏟아지는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마치고 주변 사람들의 안쓰러운 시선과 격려 속에 우리 좀비 3인방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2009 다이아몬드 울트라 레이스는 첫날 45km의 눈길과 트레일 코스를 가야 한다. 출발 전 진행자가 현재 기온이 영하 25도로 따뜻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만세를 부른다. 미친 인간들 같다. 우린 죽으라는 소리 같은데 영하 25도가 따뜻하다고 만세를 부르다니….

 

새벽에 잠깐 해가 보인 이후로 흐렸던 날씨는, 예상대로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눈이 내리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호수를 가로지르는 코스다 보니 바람의 세기가 장난 아니다. 온몸을 감싸버리는 세찬 바람에 노출된 안면 부위가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스노우 슈즈와 썰매 사용에 적응할 틈도 없이 추위가 몰려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어느 순간 유카꼬와 함께 마지막 주자가 되어 버렸다. 바람을 잔뜩 얻어 맞은 안면이 춥다 못해 아프다. 선글라스를 스키 고글로 바꾸니 안면 보호가 되면서 그나마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레이스를 할 때는 초반 5km까지 어떤 몸 상태를 유지하냐에 따라 그날의 컨디션이 좌우된다. 그런데 초반부터 너무나 고생을 하는 통에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나마 정상 궤도를 잡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스노우 슈즈에 문제가 발생됐다.
 
첫번째 체크포인트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스노우 슈즈가 분리됐다. 신발과 플레이트를 연결하는 부분의 나사가 떨어져 나가면서 신발과 플레이트가 남남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 개로 분리된 스노우 슈즈를 앞에 두고 앉아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시작하자마자 장비 이상으로 포기해야 하나?' '오늘 남아 있는 38km는 어떻게 가지?' '아니 앞으로 5일을 어떻게 버티지?'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나의 13번째 오지레이스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기는 싫었다. 아이젠을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오른쪽에만 착용했는데, 스노우 슈즈가 없는 오른쪽 다리만 눈 속에 빠지니 밸런스가 깨지면서 근육에 무리가 생긴다. 결국 스노우 슈즈 없이 아이젠만 착용하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하염없이 걸어갔다.

 

힘겹게 도착한 따뜻한 난로가 있는 두번째 체크포인트

 

먼저 도착한 유카꼬와 함께 쉬고 있는데 한 무더기의 구조요원들이 누군가를 감싸며 들어온다. 추위에 떨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저체온증 환자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호주의 '피터'였다.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이는 게 몇 시간은 추위에 떨었던 것 같다.

 

피터는 결국 후송되어 3일간을 입원한 후 호주에서 지금까지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남들보다 일주일 먼저 도착해 적응 훈련을 하고 준비한 피터는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복장을 보니 보온성에 중점을 둔 나와 달리 상당히 가볍게 입었다. 선두 욕심을 부렸던 게 화근이었다.

 

장거리 오지 레이스에서는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 처음 2일간은 욕심을 자제하고 현장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 후 신체가 환경에 적응을 하고 면역력이 생길 때부터 자신의 페이스대로 움직이면 된다. 적당한 욕심은 득이 되지만 과한 욕심은 해가 된다. 그나저나 적응 할 틈도 없이 무너져간 나의 스노우 슈즈는 어떡해야 하나?

 

 

화이트 아웃 (White out)을 만나다

 

두번째 체크 포인트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이전보다 더욱 심해진 눈폭풍이 우리를 덮쳤다. 영화에서나 봤던 화이트 아웃(심한 눈보라와 눈의 난반사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을 만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사태가 생겼다.

 

코스가 안 보이기에 바람이 조금 약해지면 바삐 움직이며 길을 찾는데, 유카꼬가 고글이 얼어버리면서 앞이 안 보인다고 한다. 내가 뒤에서 따라가며 방향을 잡아주지만 목소리가 바람에 날아가 버려 계속해서 방향을 못 잡는다. 대충 감으로 길을 찾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체크 포인트부터 우리의 뒤를 졸졸 따라 오던 강아지가 길 안내를 시작한 것이다. 몇 미터 앞에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신호를 보낸다. 아까 과자를 준 보답으로 나를 도와주는 건지 하늘에서 보호를 해주는 건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화이트 아웃 지역을 벗어나자 강아지는 자기 임무를 완수한 듯 꼬리를 흔들며 지나온 체크포인트로 돌아간다. 고맙다라는 말을 건네며 손을 흔들어 떠나 보낸다.

 

 
코스는 호수와 트레일 지역을 번갈아가며 지나야 한다. 호수 지역은 무릎까지 빠지는 미끄러운 눈밭이고 트레일 지역은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자작나무 숲이다.
 
지금까지 20km 정도를 스노우 슈즈 없이 왔다. 체력은 한계를 느껴 거의 탈진 상태고, 허리와 다리까지 아파오기 시작한다. 유카꼬가 같이 가고 있지만 일반 대회 같이 누구를 이끌거나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기서는 좋든 싫든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잠시라도 멈추면 순식간에 몸이 얼어 버린다. 기온도 저녁이 되어가니 영하 30도로 이하로 곤두박질 친다. 진퇴양난이다.
 
트레일 지역에서 스노우 모빌을 타고 가던 진행요원이 나의 모습이 보기가 딱한지 어디서 공구함을 가지고 왔다. 자기가 스노우 슈즈를 고쳐주겠다고 하며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얼마 후 철사를 이용해 임시로 고정한 스노우 슈즈를 신을 수 있었다. 비록 간지는 안 나지만 적어도 눈 속에 빠질 걱정은 덜었다.
 

 

신비의 세상, '오로라'를 만나다

 

스노우 슈즈 없이 눈길을 헤쳐 나온 덕분에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인 나의 몸 상태는 3번째 체크 포인트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멀리 작은 점이 보이면 마음 속으로 '앞으로 몇 미터'를 줄기차게 외치며 본능적으로 나아간 것 같다.

 

체크 포인트에 도착해서는 1시간 동안 기절을 했다고 한다. 나는 피곤해서 한숨 잔다고 한 것이 다른 사람 눈에는 기절한 걸로 보였나 보다. 먼저 도착한 유카꼬에게 진행요원들의 계속된 질문이 이어진다. '이 사람 괜찮냐?' '정말 갈 수 있냐?' '걱정된다.' 하지만 유카꼬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He is OK', 'He never give up!' 몽롱한 정신 상태였지만 저 멀리서 꿈결 같이 들려오는 유카꼬의 목소리는 분명 천사의 목소리였다.

 

남들은 기절이라 하지만 나는 숙면을 취했다.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늦었지만 저녁도 먹고 따뜻한 차도 마시니 몸 안의 에너지가 새롭게 충전된다.

 

 

이제 앞으로 남은 거리는 14km

 

시간은 저녁이라 코스도 어두워져 헤드랜턴을 사용해야 한다. 다행히 내리던 눈도 멈추고 저 멀리 있는 진행요원의 스노우 모빌 불빛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좋아졌다. 얼마 전까지 세차게 몰아치던 눈폭풍은 어디로 갔는지 고요함만이 밀려온다.

 

어느 대회를 참가하든 마지막 주자는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주최측에게는 민폐를 끼치는 존재일지 몰라도 마지막까지 진행요원들의 호위를 받을 수 있는 안전함이 있다. 진행요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호주의 피터와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가 포기했다고 한다.

 

'피터는 아까 체크 포인트에서 봤고, 프란체스코는 왜?' 캠프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프란체스코는 썰매에 이상이 생겨서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진행요원들이 나의 스노우 슈즈 상태를 보고 왜 많은 걱정들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 이제 5명의 사막 멤버 중 나, 유카꼬, 미호 세 명만 남았다.

 

유카꼬와 서로 번갈아가며 페이스를 리드하고 가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든다. 뭔가 기묘한 소리가 들리며 주변 환경이 싸늘하게 변한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공포스런 분위기가 엄습한다. 유카꼬가 무섭다고 한다. 무섭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 빛의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 밝은 흰색의 빛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오.로.라.다!'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만난 신비스런 오로라. 추운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들처럼 입 딱 벌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만화 영화가 따로 없었다. 우리들의 움직임에 오로라도 같이 장단 맞춰 춤을 춘다. 얼어 붙은 얼굴이지만 웃음꽃이 피니 추위도 녹이는 것 같다. 오로라는 자신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나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던 게 틀림없다.

 

오로라는 신기하게도 우리들이 가는 방향으로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출애굽의 모세가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길을 찾듯이 지금의 오로라는 빛의 기둥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밝은 오로라의 광선은 헤드랜턴이 필요 없게 만들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모르고 일찍 죽어버리면 너무나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곳에 무슨 이유로, 어떻게 왔던 너무나 행복하다는 만족감이 넘쳐난다.

 

밤 12시 18분. 45km를 오는데 꼬박 15시간 18분이 걸렸다.

 

유카꼬와 함께 마지막 주자로 캠프에 도착하니 운영요원들이 경외에 찬 눈빛으로 환호를 한다. 단지 하루만에 일주일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는 엄청난 레이스였지만 지금의 순간만큼은 즐거움만 가득하다.

 

난생 처음으로 아침에 출발해 다음날 도착하는 기록과 오로라와 함께 레이스를 하는 신기함. 스노우 슈즈 문제로 당장 내일의 레이스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진귀한 여행은 분명 좋은 결과로 끝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오늘 레이스 이후로 우리의 별명은 '좀비 3인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느릿느릿,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좀비들이다.

 

덧붙이는 글 | 사막의 아들 유지성 / www.runxrun.com 
사막, 트레일 레이스 및 오지 레이스 전문가. 칼럼니스트,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 남극 레이스, 히말라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Rock and Ice 울트라 등의 한국 에이전트이며, 국내 유일의 어드벤처 레이스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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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사는 월간 마운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다이아몬드 울트라, #캐나다, #유지성, #옐로우나이프, #오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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