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주 큰 둥근 산이라는 뜻을 가진 대둔산

 

대둔산은 노령산맥의 북쪽에서 충남 금산군 진산면·논산시 벌곡면·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걸쳐 있는 매우 웅장한 산이다. 대둔이란 이름에서 한자 둔은 둠이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다. 둠은 둥글다의 뿌리말이다. 둔산을 우리말로 부르면 둠뫼가 된다. 둥근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둔산은 큰둠뫼 즉 아주 큰 둥근 산이라는 의미다. 대둔산은 이름 그대로 장엄한 뫼무리를 이루고 있다.

 

산의 정상인 마천대에서 시작한 산줄기는 사방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면서 기암괴석을 펼쳐놓는다. 산에 올라보면 남한의 소금강으로 불렀던 옛 사람들의 안목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둔산의 서편, 논산시 벌곡면 쪽 산자락엔 작고 볼품없는 암자 하나가 있다. 석천암이란 암자다. 오랜만에 석천암을 찾아간다. 벌곡면 수락리의 대둔산 관리사무소 앞에서 차에서 내려 가까이 있는 수락계곡을 지향하고 걸어간다. 수락계곡은 대둔산의 비경 가운데 하나다.

 

산길치고는 꽤 너른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이내 석천암 가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바를 따라 왼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가는 길은 오솔길이다. 산자락 여기저기에 군락을 이룬 사철 푸른 산죽이 길손에게 인심 쓰듯 내어준 길이다. 

 

십여 분가량 허위허위 산길을 올라가자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잠깐 숨을 멈추고선 채 맞은 편 봉우리를 바라본다. 월성산과 바랑산 줄기다. 잔잔한 물결 같은 능선을 지닌 산이다. 언제 한 번 날 잡아 저 산줄기를 타보리라. 다시 산길을 오른다. 오르다 보니, 바위 사이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는 풍경이 눈길을 붙든다.

 

물은 대롱 대신 꽂아놓은 산죽잎의 표면을 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아래에 받쳐둔 양동이 속으로 떨어진다. 누가 저곳에 산죽 대롱을 박아 물을 받아 오가는 길손의 갈증을 달래줄 생각을 했을까. 산엔 이렇게 곳곳에 은자(隱者)가 숨어 있다. 그래서 산이 더욱 아름다운지 모른다.

 

산길을 30여 분이나 올라갔을까. 눈앞에 어렸을 적 우리 집 대문을 닮은 사립문이 나타난다. 문엔 善來善去(선래선거)라 쓰인 팻말이 붙어 있다. 좋게 왔으니 좋게 다녀가라는 뜻? 이 생전 처음 보는 조어가 겁 많은 나를 잠시 겁먹게 한다.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석천암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석천암은 날개를 편 독수리 형상을 닮은 듯 우뚝 선 독수리봉 아래 앉아 대둔산 최고봉인 마천대를 바라보며 볕바라기를 하고 있다.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 이달 선생이 머물던 곳

 

석천암은 우리나라 주역사의 전설적 기인인 야산 이달(1889~1958)이 동양학의 정수랄 수 있는 홍역학의 토대를 마련한 곳이다. 야산 선생은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역사풍속기행>, <한국사 이야기> 등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아버지다. 그의 이름 가운데에 든 이(離자)는 이이화 선생의 아버지가 <주역> 팔괘의 순서에 따라 아들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이괘(離卦)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지금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야산 선생은 전라도 지방을 비롯한 전국 각지를 주유하면서 주역 공부에 매달렸다. .

 

그가 석천암 아래 동네인 수락리로 이주한 것은 57세 때인 1945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은 수락리에 놔둔 채 1947년 봄엔 석천암으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을에 이르러선 홍역학회를 창립했다. 홍역이란 주역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으로 주역(음양설)과 홍범(오행설)을 조화시킨 것이다.

 

또 야산 선생은 주역 이론에 근거해 선천(先天)·중천(中天)·후천(後天)의 논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후천개벽사상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증산교·원불교 등 민족종교가 표방했던 반상(班常)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를 제시한 것이다.

 
당시 홍역확회 회원이 무려 1만 2천명이나 되었다는 건 일제 암흑기를 살아가던 이 땅 민중들의 이상사회를 향한 갈증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대목인지 모른다.

 

앞날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도록 불안하기 때문일까. 요즘 우리 주위엔 주역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이화 선생은 주역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 경계심은 주역의 대가였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영웅주의적 접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태도는 사실에 토대를 둔 과학적인 역사를 세울 수 없거니와 역사를 올바로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생이 아버지에게서 받았을 게 틀림없는 혈연적·사상적 영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달 선생은 왜 이곳 대둔산을 삶의 터전으로 택했던 것일까. 대둔산의 둔(屯) 자는 하늘 아래에 산이 있는 형태다. 육십 사괘 중의 하나인 둔괘(屯卦)가 은둔을 뜻하는 괘라고 하는 것도 아마 그 언저리에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석천암 자리가 버려진 폐사지였는지 아니면 야산 선생이 처음으로 터를 닦고 난 후에 건물을 들어앉힌 곳인지 하는 점이다. 나로선 전자에 더 신빙성을 두는 편이다.

 

아무튼 야산 선생이 주거하시던 당시의 석천암은 한국전쟁 말기에 불탔다고 한다. 지금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살림을 겸한 인법당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인 대웅전과 대웅전 건물에 달아맨 작은 건물, 좀 떨어져 절벽 옆에 산신각이 자리 잡고 있다.
 
문 위에는 석천암 편액과 액자에 담긴 대웅전 편액이 걸려 있다. 대웅전 출입문인 띠살문은 열린 채 주렴이 쳐 있다. 그 사이로 언뜻 방안 풍경이 들여다 보였다. 촛불이 켜진 방안에는 스님이 앉아 있고 그 뒤편으로는 세 분의 부처님을 보였다. 천산(天山)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다. 어디에선가 저 스님이 증조부 때부터 주역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법명만 놓고 생각하면 오히려 선(仙) 쪽에 더 가까운 분이 아닌가 싶다. 아우른다는 것, 요샛말로 하면 퓨전이란 어찌 보면 독선보다 더 위험한 자기 상실일 수 있다.
 
이이화 선생 "나는 이 절간 같은 곳에서 줄곧 배고픔에 시달렸다"

 

참으로 누추하고 비좁은 곳이다. 지금도 이럴진대 당시엔 어떠했을까. 야산 선생은 1947년 12월 26일 개태사 신명행사 전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이화 선생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나 한창 성장할 나이였던 나는 이 절간 같은 곳에서 줄곧 배고픔에 시달렸다. 논산 등 인근에서 공부하러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 먹을거리를 들고 와서 뒤주에 부어놓았다. 하지만 서울이나 먼 곳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쌀 뒤주는 자주 비었으며 세 끼 모두 멀건 죽으로 때우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야산선생이 어디론가 편지를 써보내면 먹을거리가 제법 넉넉하게 공급되기도 했다.

                              -  '나의 삶, 나의 아버지' (신동아 2004 년 9월호. 통권 540 호)에서

 

 이이화 선생은 수락리와 석천암에서 그렇게 3년을 산 뒤 한국전쟁 직전 서산 안면도(당시는 서산군에 속함)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석천암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엔 높다란 암봉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가 있다. 석간수를 한 바가지 떠 마신다. 차가운 바위에서 밀려오는 듯한 음기 때문인지 물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대둔산을 즐겨 찾는 산꾼들은 꼭 이곳에 들러 물을 받아간다. 석간수 옆에는 철불인지 소조불인지 목불인지 알 수 없는 검게 칠한 아미타불 부처님 한 분이 앉아 계신다. 마치 "흠, 몸이 목마른 건 아는 것들이 어찌하여 정신이 목마른 것은 알지 못하는고?" 묻는 듯하다. 

 

참다운 나만 남기고 모조리 죽일 것

 

 

 

나는 어떤 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하려고 이곳에 왔던가. 그것은 불교도 유교도 아니며 선(仙)도는 더욱 아니다. 생애 내내 죄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한곳으로만 정진했던 야산 선생의 불굴의 의지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나에겐 그런 철두철미함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적에 겪었던 그 어떤 가난보다 더한 뼈저린 궁핍이었다. "늦었다고 할 때가 사실은 늦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라는 말이 나를 위안한다. 이제부터라도 철저하게 살면 되지, 암. 

 

석천암을 떠나 다시 길을 나선다. "낙조대를 오른 다음 그 아래 태고사나 들렀다 갈까, 아니면 정상인 마천대로 갈까?" 망설인 끝에 마천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10여 분가량 가파른 길을 올라가자 수락계곡으로부터 올라오는 길과 교차하는 고개가 나온다. 고개에 서서 저 아래 아득히 떨어진 석천암을 바라본다.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천암의 전모(全貌)가 확연히 드러난다.   

 

"석천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비불비유다(非佛非儒)다."

 

나 역시 비불비유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거든 공자를 죽이면 될 일이다. 나 아닌 것은 모조리 죽이고 나면 참다운 나만 남을 터.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석천암도 내 말에 동조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감히 무생물 따위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작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대둔산 일대를 답사한 것을 이제야 쓴 것이다. 그때 석천암에도 몇 차례 들렀다. 답사기가 늦은 것은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다. 이 점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구차하게 쓰지 말고 끝내 묻어두어도 좋았을 것을…. 


태그:#대둔산 , #석천암 , #이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