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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에서 사상·교양 강좌 강의를 마친 조수현은 이두오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군 비행기의 공습 때문에 멀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군의 공습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제는 용산 일대가 초토화되었다고 했다. 서울에 부임하는 날 용산으로 간다던 트럭 위의 소년병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확한 전황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려 사령부가 있는 화신백화점 건물로 가서 박 소좌를 만나 보기로 했다.

 

박 소좌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회의를 하러 정치보위부에 갔다고 했다. 정치보위부가 있는 종로경찰서 건물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서 10분 남짓의 거리였다. 그녀는 정치보위부 청사 1층 현관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박 소좌를 기다렸다. 출입하는 보위부원들마다 그녀의 모습을 힐긋힐긋 보며 지나갔다. 다른 군인들은 여자를 그렇게 구경하듯이 보지 않는데 가장 엘리트라는 보위부원들은 유독 다른 것 같았다.

 

조수현은 자신이 신문했던 정치보위부원 이명준을 생각했다. 그는 일반 병과로 전출되었으니 지금쯤은 낙동강 부근 어딘가에 가 있을 터였다. 그녀는 이명준처럼 유약하고 비실거리던 군인이 무슨 전투를 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눈빛을 가진 남자들은 끝내 제 버릇을 못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투에 가서도 그런 사내는 언제나 여자나 생각하며 센티멘털리즘에 젖을 타입이었다. 모범생도 싫지만 이명준 유형의 사내는 그녀가 기피하는 제1호 남성 타입이었다.

 

그녀는 유명하다는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읽고 여러 가지로 실망했었다. 특히 주인공 이형식에 대한 실망이 무엇보다도 더 컸다. 여자만 보면 무조건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타입은 정말 질색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런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게다가 언제나 현학적으로 여자를 대하는 남자도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 노력은 하려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바라는 것만 많은 성격은 남자건 여자건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명준은 바로 <무정>의 이형식과 비슷한 남자였다. 그녀는 이명준을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그때 박 소좌가 나와 주었다.

 

"아니, 수현 동무, 나는 반가운데 수현 동무는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네요."

"안녕하셨어요?"

"무슨 일 있었소?"

"아닙니다. 이상한 남자들을 생각하다 보니 속이 좀 안 좋아졌어요."

 

박 소좌는 턱을 흔들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우리 수현 동무 성깔은 정말 아버님을 쏙 빼 닮으셨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성격이 더 좋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보위부 건물을 나온 두 사람은 인사동 한식집을 찾아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전차의 80%가 파괴되다

 

"수현 동무, 저는 서울에 와서 느낀 바가 참 많습니다. 전쟁만 아니라면 서울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저도 서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풍광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사실은 지금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한반도 국토의 90%가 우리 수중이기는 하지만 낙동강 전투에서부터는 벌써 한 달째 답보 상태입니다. 미군과 남조선군은 마산에서 낙동리를 경유해 영덕까지 240km에 이르는 방어선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켜내고 있습니다. 적군은 국토를 거의 잃고 7만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지만 우리 전차도 80%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병력 손실도 5만이 넘습니다.

 

게다가 포항 전투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미군에게 대규모 공군기지를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병력의 대부분이 낙동강에 집중되어 있는 이때, 군산이나 인천 그리고 남포 같은 데로 화력 좋은 적의 상륙 부대가 밀고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입니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이 가 있습니다.

 

모택동은 전황을 비관적으로 보며 적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예고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핵을 의식하여 직접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급과 병력이 달리다 보니 각지에서 무리가 생기고 있습니다. 특히 의용군을 강제 징발하면서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서울 학생의 반이 의용군으로 나갔습니다. 전쟁의 논리가 사회주의 이념을 압도하는 나머지 당에 대한 순결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기독교의 근본주의와 비슷하게 불온한 것입니다."

 

러시아 유학생 출신 박 소좌는 전황을 냉정히 분석하고 있었다. 조수현은 이두오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서울을 다시 내 줘야 하는 상황이나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지구대로 돌아오는 길에 조수현은 만에 하나라도 서울을 내 줄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두오가 보고 싶었지만 그의 연구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미안해서 가지 않기로 했다.

 

천재 물리학자의 어린 시절

 

조수현이 이두오를 찾아간 것은 이틀 후 오후였다. 그녀는 깨를 듬뿍 넣은 주먹밥을 만들어 봉지에 담았다. 이두오는 가마니에 엎드려 종이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물론 아주 어려워 보이는 수학이었다.

 

그녀를 본 이두오는 부리나케 몸을 일으키더니, 움막 안의 너저분한 것들은 급하게 치웠다. 찌그러진 양은그릇과 빛바랜 내의들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무슨 계산을 하고 있었나요?"

"쉬운 겁니다. 미리미터와 광년의 관계를 따져보고 식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너무나 차이가 커서 둘을 함께 말할 수가 없겠는데요?"

"아닙니다. 미리미터와 광년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큰 차이가 없다고요?"

"수식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기껏해야 20 정도의 차이밖에는 나지 않지요."

 

이두오는 조수현에게 계산하던 종이를 꺼내 보였다.

 

"10의 71승 광년은 10의 90승 미리미터입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숲길을 걸었다. 보일 듯 말 듯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흙냄새는 배 향기 이상으로 향기로웠다. 조수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별을 못 보겠군요?"

"하지만 별 이야기는 들으실 수 있습니다. 수현 씨가 원하신다면..."

 

조수현은 이두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배밭을 가로지르자 조그만 연못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발을 멈추고 연못의 수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주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나요?"

"어려서입니다. 아마 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이두오의 눈빛에는 아스라한 안개 같은 것이 지펴지고 있었다.

 

"저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 고관의 별장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일본인과 바둑을 두시는 동안 저는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정원에 있는 작은 연못의 잉어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저는 정원석 아래로 내려가 쭈그리고 앉아 연못의 잉어를 재미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연못의 수면에 동심원들이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빗줄기가 굵어지자 수면은 출렁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기이한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물 속의 잉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잉어들에게 연못의 수면은 인간에게 하늘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두오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듬직한 손으로 더벅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흙냄새가 물씬 코로 스며들었다.


태그:#모택동, #낙동강전선, #무정, #이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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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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