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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복날의 손수레 10

"그런데 구철이 말이야…"
"예."

"어느 날 선생님한테 카드를 주는 거야. 그러고는 부끄러워하더라구. 무슨 내용이 씌어 있나 펼쳐봤더니,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해서 글짓기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을까 밤새도록 생각해 봤다는 거야. 그러다가 마침내 알았다는 거야.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보다 약한 여자아이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야."
"어머! 정말요?"

"그럼. 그리고 내년에는 내가 다른 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치게 되었고, 다른 작가 선생님이 가르치실 거라고 하자, 너무 서운해 하는 거야. 아마 내가 다른 부잣집 아이들 꾸짖는 것보다 구철이 꾸짖는 게 훨씬 약했을 거야. 그 학교 주변이 부잣집 동네잖아. 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으니 못 사는 집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지. 10명이 부잣집 아이들이면 그 중 한 명 정도가 가난했었어. 나는 그 중에도 특히 가난한 구철이가 내 꾸지람으로 상처받지 않도록 꽤나 조심했었어. 그런 걸 알았는지, 녀석도 생각이 있었던 거지." 

"예, 구철이가 심성(心性)은 깨끗한 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렇지? 자, 어디 가는 길 아니었니? 그만 일어나자."
"예, 저는 시간 괜찮은데 선생님이 어두워지기 전에 리어카 일 보셔야 할 테니까요."

그때 까르푸와 건설회관 사이에 있는 중앙공원에서 효진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선호는 리어카를 끌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 빌라에 도착했다.

빌라 현관 앞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선호는 그런 증세가 생긴 것이 200자 원고지 7000매의 대하소설 <북한강>을 쓰고 나서부터가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인물 가운데 악역(惡役)으로 설정한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주위에 숨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바둑을 둘 때도 그랬다. 아마 3단의 실력이었지만, 악역 등장인물들이 자꾸 머릿속에 나타나 집중력을 깨뜨려 놓았기 때문에 도무지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선호는 자물쇠를 풀고 어수선한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있던 헌 잡지와 소설책이 가득 든 박스, 책꽂이와 책꽂이 앞에 고층으로 쌓여 있던 책들을 많이 팔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집 안은 한 군데도 정리된 것이 없었다. 박스며 책꽂이 앞에 잔뜩 쌓아 놓았던 책들 가운데서 팔아버릴 것을 빼냈기 때문에 짐은 분명히 줄어들었지만,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관할 책들이나 신문, 잡지, 앨범, 출판기념회 방명록 등을 여기저기 아무데나 쌓아놓다 보니 오히려 더 어수선해진 셈이었다.    

선호는 현관에 묶어 쌓아둔 신문더미며 책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 눈에 거의 다 들어올 만큼 협소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화가들의 화실에 이것저것 쌓여 있는 경우가 많지만, 선호의 집 안 풍경에 비하면 화가들의 화실은 오히려 깨끗한 공간인 셈이었다.    

선호는 책꽂이에 있는 튼튼한 스카치위스키인 21년산 로얄살루트 병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아름다 제약 50주년 사사(社史)를 집필할 때, 자신의 저서를 70세의 김길한 회장에게 선물로 증정하자, 1주일 뒤 R호텔 접견실에서 극찬하여 독후감을 들려주고는 선물로 준 것이었다. 값비싼 술이라 마시지 않고 박스에 그대로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만취하여 들어와 한 번에 나발 불어 버렸었다. 그러고는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오래 숙성된 좋은 술이라 그런지 뒤끝은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피식 하고 자신을 비웃는 실소(失笑)가 새어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선호는 집안을 정리하는 데 신경을 뚝 끊어 버렸다. 정리하는 게 도무지 귀찮았다. 어려서부터 "선호는 방 정리를 참 깨끗이 한다"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을 만큼 선호는 1주일에 한 번쯤 대청소를 시작했다 하면 머리카락 한 올 눈에 띄지 않도록 깔끔하게 정돈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집 안을 그대로 내버려두기 시작했는지 선호 자신도 그때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꽤 오래 궁리해 보아도 그때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어쩌면 선호가 여자와 사귀지 않기 시작한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민주초등학교 방과후 특별활동 시간에 효진이를 포함한 여러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선호는 한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열 살 아래의 그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선호의 저서를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을 만큼 선호 소설의 애독자였다. 탤런트 한지혜를 닮은 귀여운 얼굴인 데다 아주 듣기 좋은 귀여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대학로에서 더러 만나, 식초가 듬뿍 들어간 골뱅이를 안주로 생맥주를 마시고는 그녀의 집 부근까지 바래다주곤 했는데, 1997년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왔었다.  

"선호씨, 저 정인이에요."

[계속]

겉모양만으로는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책들 앞에 놓여 있는 고급 스카치위스키 21년산 로얄살루트 병이 위세를 떨차고 았다.
▲ 어수선한 책꽂이 겉모양만으로는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책들 앞에 놓여 있는 고급 스카치위스키 21년산 로얄살루트 병이 위세를 떨차고 았다.
ⓒ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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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4년 말에 초고를 써놓고 PC 안에 묻어두었던 소설입니다만, 그 시절의 세상 이야기와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덧붙여서 많은 부분 보충하고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선호의 눈을 통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여러 실화를 모델로 한 서사성 있는 창작입니다.



태그:#모래마을, #책, #책꽂이, #화실, #집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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