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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애마 로페카(Ropeca) 독사진.
▲ 카리브 해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애마 로페카(Ropeca) 독사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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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장티푸스와 A형 간염 예방 접종하고 왔다지만 러시안 룰렛처럼 언제 음식을 먹을지 모르는 불규칙한 식사와 그나마 상당량의 길거리 음식 섭취, 거기에 때때로 자행되는 금식(자발적이 아닌 어쩔 수 없이 식사를 거르는 상황)으로 하루 두 끼가 일상화된 자전거 여행자에게 '폭풍설사'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비까지 오니 처량해도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없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동전 몇 개만 둔팍하니 쨍그랑거리고, 비 갠 후 쌀쌀한 바람은 마음까지 시리게 만든다. 그나마 마음의 안식을 줄 줄 알았던 교회에 가 보니 뚫린 벽으로 새는 공기가 무척 춥거니와 모기가 들끓는 바람에 예배당에서의 쉼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혹시나 하룻밤 몸 누일만한 곳이 있나 광장 주변 숙소를 돌아보았다. 지역 관광지 정도 규모인 작은 마을에서 초라한 나그네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기만을 바랬다.

평평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 유카탄 반도 도로 평평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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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피하기 위해 앞문과 뒷문이 뚫려 있는 형태의 유카탄 반도 전통 가옥. 이 건물은 특별한 형태로 거대하게 지어졌다.
▲ 파하(Paja)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앞문과 뒷문이 뚫려 있는 형태의 유카탄 반도 전통 가옥. 이 건물은 특별한 형태로 거대하게 지어졌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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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하룻밤 숙박하는데 얼마인가요?"
"3만 9천원이요."

무뚝뚝한 여주인의 말에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떨려 왔다. 착잡한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온화한 표정으로 힘을 주고 재차 질문했다.

"혹시 예보다 더 저렴한 곳은 없을까요?"
"서너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모텔이 몇 개 있으니 그리로 가보시죠."

작은 해안가 마을 푸에르토 모롤로스 광장에 세워져 있다.
▲ 미니 피라미드 작은 해안가 마을 푸에르토 모롤로스 광장에 세워져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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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아늑한 곳.
▲ 푸에르토 모롤로스 해안 조용하고 아늑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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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짧은 말을 남긴 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비포장 흙길을 조금 따라가다 보니 반갑게도 몇 개의 숙소가 보였다. 그 중 그물 침대에 누워 맥주 한 병을 쥐고 여유를 만끽하는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이곳에서 하루 묵는데 얼마인가요?"
"두 명이서 자는 도미토리가 있는데 2만 6천원이에요."
"아, 그렇군요."
"이 마을에선 가장 저렴한 가격이에요. 어때요? 방을 보여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호의마저 거절해야 하는 좌절감. 하루 5달라로 살아가는 내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가격이었다. 광장으로 가자니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을, 자꾸 부딪히는 사람들 시선이 불편해 뒤편 해변으로 돌아나갔다. 트인 공간에 남겨진 벤치에 힘없이 앉고 보니 머리 하나 둘 곳 없는 고단함에 짙은 한숨만 토해낸다. 누구에게 화낼 상황도 아니고, 스스로를 책망할 이유도 없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춥고, 배고팠던 때. 바로 맞은 편엔 군부대가 있었다.
▲ 낭만적으로 보일까? 바닷바람을 맞으며 춥고, 배고팠던 때. 바로 맞은 편엔 군부대가 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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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앉아 있자니 배가 고파왔다. 오늘도 아침은 건너뛰고, 낮에는 도로 변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 닭튀김으로 때운 것이 전부였다. 모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 생각해야 했다. 무슨 거창하고 거룩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 그저 자전거 여행하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얘기지만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다닌 세례 요한에 감정이입을 하고 다니니 그런 대로 견딜만도 했다.

저벅거리며 해안가 남루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가족 단위로 온 여행객들은 푸짐한 저녁식탁에 분위기 띄워줄 한잔 맥주로 이 밤을 얘기하고 있었다. 구석으로 몸을 밀어 넣은 나는 주인장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고 짐짓 웃어 보였다. 그리곤 나직이 말했다.

옥수수반죽 안에 치즈나 고기를 넣고 옥수수 껍질로 싸서 찐 중남미 서민 음식.
▲ 타말레스(Tamales) 옥수수반죽 안에 치즈나 고기를 넣고 옥수수 껍질로 싸서 찐 중남미 서민 음식.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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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말레스 하나만 주실 수 있나요?"

내 마음을 알아챈 걸까. 조용히 주방으로 돌아간 주인장은 얼마 후 접시에 하나뿐인 타말레스를 차려 왔다. 옥수수 반죽 안에 다진 고기와 야채를 넣어 옥수수 잎에 싸서 삶아 만든 타말레스를 한 입 먹으니 그제야 생의 기쁨이 물밀 듯 들어왔다. 한 입 거리나 될까 한 것에 나이프와 포크가 준비되어진 게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 눈 감추듯 접시를 비우고 나니 입맛만 쩝쩝 다시는 게 영 아쉬웠지만 과감한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가장 늦게 들어와 가장 빨리 자리를 비운 한 초라한 자전거 여행자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게 더 감사한 순간이었다.

다시 아까 그 벤치로 돌아왔다. 밤은 더욱 더 깊어졌다. 오늘 밤을 또 어디서 유해야 할지 걱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 때 담벼락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구원의 손길이 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는 눈으로 형상을 살펴보니 군인이었다. 그리고 담벼락이라고 봤던 곳은 부대 초소였다. 군복을 입은 젊은 친구는 흥미와 걱정이 동시에 섞인 투로 내 안부를 물어왔다.

피사의 사탑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기울어진 등대. 이곳의 명물이다.
▲ 유일한 볼거리 피사의 사탑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기울어진 등대. 이곳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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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 위 배 한 척.
▲ 밤 늦은 해변 모래사장 위 배 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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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잘 만한 곳이 없지 뭐야. 해변에 텐트치고 자기에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싼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광장에 경찰서는 아예 도미토리가 없더라고. 혹시…."
"응?"
"아니야. 혹시 거기에 빈 공간 있으면 텐트라도 칠까 싶었지. 아무래도 안전하니."
"그렇군. 유감스럽지만 여긴 군부대라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잠깐만 기다려 봐."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 후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다른 군인과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상관은 내게 간단한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부대 안으로 들어오란다. 흠칫 놀란 나는 정말로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문제 없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웃으며 재촉했다.

작은 마을 해안에 주둔한 이곳은 조그만 소부대였다. 부대원들은 전혀 낯선 이의 등장에 황당해 하면서도 부대원의 설명을 듣고서는 경계심을 풀고 호기심을 가동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선 늘 잠자기 전까지 문답대화가 일상이다.

보안을 이유로 막사 내부와 군인들 사진은 찍지 못했다. 숙소시설은 별로였지만 바닷바람이 잠잠히 들려오는 낭만적인 숙소였다.
▲ 막사 안에서 바라 본 풍경 보안을 이유로 막사 내부와 군인들 사진은 찍지 못했다. 숙소시설은 별로였지만 바닷바람이 잠잠히 들려오는 낭만적인 숙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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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초소 쪽에 빈 침대 하나가 주어졌다. 바퀴벌레가 벽을 기어 타는 걸로 보아 그다지 깨끗하지도 않고, 침대와 거울, 그리고 화장실뿐인 무척이나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혼자만 독립적으로 쓸 수 있다는 건 봐 줄 만 했다. 군인들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양치와 간단한 세면을 하고 나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푹 꺼진 얼룩진 매트리스 하나 두고는 침대라고 말하지만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게다가 민간인 신분과 외국인 신분이라는 이중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군인 막사에서 잔다는 것이 너무 생경스러운 경험이었다.

털썩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군인 막사에 다 재울 생각을 했을까. 그러면서 경직되어 있고, 권위적일 것 같은 군인이 베푼 친절을 그려보니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어디에서도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푸에르토 모롤로스 밤바다 소리가 행복하게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심야 불청객인 모기도 그 소리에 편승해 귓전에서 왱왱 날개를 비벼댔다. 나, 군인 막사에서도 자는 자전거 여행자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멕시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배낭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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