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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만에 다시 찾았다.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하는 이만열 장로님의 한국교회사 강의 숙제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견학을 다녀왔다. 전과는 다른 모습들이 전체와 부분적으로 눈에 휙휙 들어오며 세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차디찬 늦겨울 바람과 함께.

100주년기념교회라는 이름의 간판들이 한꺼번에 여럿 보였다. 깔끔하고 번듯하게 지은 건물들 사이의 마당 같은 곳에는 단체 방문객들이 북적거렸고, 파란색 패딩을 입은 분들이 일괄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개신교 특유의 환한 미소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환대로.

우리 일행은 예약을 하지 않아서 다른 단체객들과 함께 움직여야했다. 장로님의 포스가 느껴지는 남자 어른께서 존댓말을 해주시며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 2층으로 올려보냈다. 먼저 도착한 단체 손님들이 묘원 소개 영상을 시청하고 있어서 숨죽이며 대세에 합류했다.

동영상은 주요 선교사 4명의 사역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빈민 자녀들을 위한 근대 교육의 산실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턴, 결핵 퇴치를 위한 의료 선교사 M.J. 홀, 백정 해방운동의 아버지 무어, 문서선교를 하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던 헐버트. 이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레이놀즈, 베델, 해론, 애버슨, 소다가이치, 위더슨, 배어드의 순서로 짧고 굵게 소개하였다.

영상을 다 보고 우리는 먼저 지명되어 한 여자 성도님의 안내로 밖으로 나가 묘원을 둘러보았다. 묘역에는 3년 전과 달리 안내판과 울타리가 다듬어져서 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되어 있었다. 또 묘비 앞뒤로 관련 단체들의 기념비도 꽤 많이 세워져있었다. 간간이 꽃다발이 불균등하게 놓여져있기도 했다.

묘비나 안내판이 새로 생겼다.
▲ 양화진 묘원 묘비나 안내판이 새로 생겼다.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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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된 묘역 순례 시간이 얼추 끝날 즈음, 양화진 홀이라는 곳에 들어가 한바퀴를 천천히 돌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주 세련된 전시 공간인 이곳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의 역사를 주제별로 전시해 놓아 건립된 지 1년도 안되었지만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고 있었다. 안내해주시는 분은 미술관 도슨트 같았고, 이런저런 신기한 기술과 시설에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상근 직원 같은 느낌의 안내원 가슴에 작게 달린 명찰을 이제야 자세히보니 100주년기념교회 성도였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오랜 공방 끝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법적 소유권"을 따내어 관리하고, 교회가 봉사 사역의 차원에서 사람들을 투입하고 있었던 것.

안내원의 친절한 설명을 받으며 묘원 곳곳을 돌았다
▲ 안내 안내원의 친절한 설명을 받으며 묘원 곳곳을 돌았다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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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느낌으로는 대단한 섬김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지만, 이내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아쉬움과 불안이 급습해 온다.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되게 보존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누구에게 영광이 되는 일이며, 어떤 힘이 이곳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걸까.

멀티미디어 기술이 더 발달하면 묘지 앞 십자가 돌상 근처에 스크린이 설치되어 선교사의 얼굴과 활동상을 야외에서 바로 볼 수 있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조만간 선교사들의 육성을 직접 듣고, 중요한 선교 사역의 현장을 3D나 시뮬레이션으로 체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계속 치장하고 업그레이드한다면야 충분히.

다시 묵상하게 된 선교사님들의 훌륭한 업적들은 역시나 인상적이다. 젊은 선교사의 헌신, 봉사, 희생은 값진 유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제대로 기념하려면 공(功)과 과(過)를 동시에 조명해야 하지 싶다.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그 분들의 한계도 함께 다루어주면 더 균형 잡힌 묘원이 될 터인데...

예를 들어, 당시 보편적으로 통용된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이나 서구문화 우월의식에 대한 반성, 그리고 선교의 과정에서 '서구선진문화=복음=선', 그리고 '미개동양문화=미신종교=악' 이라고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오늘날 선교방법에 대한 반성과 성찰할 수 있게 안내해주면 좋으련만. 또한 선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선교 방법과 때로 무분별한 열심과 행동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경쟁적인 선교 형태나 갈등 구조에 대한 각성도 일깨워주면 좋으련만.

사실 당시 선교사들은 막대한 자본과 근대 교육, 의료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여 향후 국내 교육 및 의료 발전을 종속시켰다. 그들의 출신성분은 대개가 미국, 캐나다의 대재벌이었고 젊은 자본가나 기술자였다. 오늘날 그 화려한 부분만 우러러보며 내용보다 형식적 측면에 치중하는 경향은 실로 안타까운 지점이다.

나아가 "당시 선교사들의 열정을 본받아 우리도 학교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안내자의 멘트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느낀다. 사학 비리의 주범이 종교사학이라는 사실을 진정 모르시는 건가. 알면서도 자기와는 상관없이 그 힘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여기시는 건가.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 감사하고 존경할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되면 주체적인 성경 번역과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의 전통이 옅어 질 우려가 있지 않을까. 당시의 역사적 한계를 인식하고 오늘날 주체적으로 수용한 결과로서의 선교 역사를 통전적으로 인식해야 하겠지.

묘원 "견학"을 마치고 나오는 길, 안내문에 적힌 "성지"라는 글귀가 마음에 내심 걸렸다. 사실 개신교는 성지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천주교와 같은 율법의 패러다임이 아닌, 성령의 패러다임에서는 시공간적 특권과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숨을 거두신 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진 사건은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적인 제한을 초월하신 예수님과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면 어디서나, 누구나, 언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 성지이다.

그런데 성지 보존이라는 핑계로 종교 사업 단체들이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성지화하여 장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교사들의 묘원을 성지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리이거니와 성지순례를 빙자하며 묘원관리를 통한 기득권을 누리고,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과 의를 드러내려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법적 소유 따위나 강조하며 한국 선교사 공통의 유산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느끼는 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양화진선교사묘원에 다녀오면 모두가 하나같이 하는 반응이 "선교사들의 정신을 이어 받겠다, 그들의 눈물과 헌신 덕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 같아 고맙다"일 뿐.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며 삶의 변혁이 담보된 고백이라기 보다는, 뭔가 박제화 되어 정답 같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고백들에 그치는 것 같다. 아무래도 교회에서 그런 가벼운 말, 텅빈 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그런 듯.

오늘날 개신교의 순교는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종교 억압에 의해 죽거나 병들어 그 지역에서 죽는 것을 뜻한다. 가서 전하는 선교만 있지, 와서 보게하는 선교 방식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어떻게든 가시적인 성과와 현상을 위주로 전도 사역을 평가하는 잣대 때문이리라.

하지만 복음 선교를 총체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면 오늘 여기의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삶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우상들이 강요하는 삶을 거부하고 어떻게 새로운 삶을 생성해 갈 것인지로 우리의 선교 방향이 자리 잡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3월 중순에 군 입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군대에서 어떻게 내 신앙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야 할지 고민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순교의 각오로 짜증내거나 쉽게 지치지 않고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잘 모으며 훈련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한반도의 특수성에 의한 분단 상황을 국제정치적으로 인식하며 참 평화를 지향하며 복무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훗날 선교사들 앞에서 나도 감히 당신네들의 후손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선교와 순교를 맞물려 생각하기에 양화진묘원은 뭔가 2% 부족하지 싶다. 그래서 가깝게 맞닿아 위치시킨 절두산순교성지가 바로 하나님의 재미있는 의도가 아닐까. 양화진에서 동행들과 만나기 전에 나는 홀로 절두산에 다녀왔다. 원래는 양화진에 같이 가려던 이들에게 제안을 했지만 아무도 안 왔다. 혼자여서 더욱 집중력 있게 선교사들의 헌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 과제를 고민할 수 있었다.

절두산순교성지는 병인년(1866년) 천주교 박해로 한국의 수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리어 숨진 뒤 절두산(切頭山:머리가 잘림)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고, 이런 참수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 장소에 세운 천주교 순교자들의 기념 성지이다. 기념관과 전시관에서 당시의 사회, 문화와 선조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사건과 관련된 야외 전시물도 많이 전시하고 있다. 루르드 마사비엘을 본딴 성모동굴, 성모 동상 등을 비롯하여 예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14개로 나누어 각각 묵상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도 있어서 순례객들에게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절두산 성지의 박물관에서 내려다본 경관
▲ 절두산성지 절두산 성지의 박물관에서 내려다본 경관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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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국가권력의 모진 고문과 핍박, 모욕을 견디며 강요당한 배교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예수가 로마군인들의 조롱과 채찍질을 버티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란 유혹에 묵묵부답하며 결국 죽음을 선택했듯이. 천주교 신자 1,800여명(병인년에만)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할 수 있었는데도, 처형당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유일한 신앙 고백으로써의 순교는 정말이지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진정 순교자들은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리 순교의 역사가 뿌리 깊게 있어서 순교에의 지향성이 역사적으로 강하게 뒷받침된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 뿌리를 외세 의존적 혹은 사대주의적 사상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각 강단에서 선포되는 핵심 메시지가 천주교는 순교, 개신교는 만사형통이라는 두갈래 길로 더욱 멀리 벌어진 것은 아닐까.

절두산성지 주임신부는 우리가 오늘날 이어받아야 할 순교정신을 "곧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낭비와 사치를 하지 않으며 이기심을 극복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 개신교의 선교 프레임보다 더 통전적이었다.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의 순교 역사에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는 길은 함께 하나되어 더불어 사는 삶 뿐이리라. 나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통일을 꿈꾼다. 제도적으로 분파가 많아지고, 가진 게 많아져 몸집만 커버린, 국가교회화로 인한 체제적 보수성의 약점들을 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되어 한몸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꿈을 꾼다. 양화진과 절두산 사이에 있던 담을 허물고, 두 단체 공동의 이익을 목적으로 공용 주차장이 생긴 것은 그 꿈을 앞당겨주는 듯 했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서로 부둥켜 안으면 좋겠다.

순교자들이 애처롭게 얼싸 안고 있다
▲ 순교사 기념상 순교자들이 애처롭게 얼싸 안고 있다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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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양화진, #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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