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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던 이명우(李命羽) 부부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동안 이명우 부부가 안동 출신이었으며, 1920년 12월 부부가 함께 독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는 내용 뿐이었다.

 

그러던 중 2009년 1월 이명우의 손자 이일환(74세 대구시 동구 불로동)씨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가 발견돼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2월 25일 오후 3시 안동독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에서 이일환씨와 그의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조부모의 유서가 전격 공개됐다.

 

이명우(1872~1920, 본관 진성, 자 明甫, 호 誠齋)는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에서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유학자로 성장했고 14세에 이르러 봉화 유곡(닭실마을) 안동 권씨 권성(權姓: 1868∼1920, 당시 17세)에게 장가를 들었다.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나라 일을 애통하게 여겼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문을 닫고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근심과 분노로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다. 이때 이미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아직 부모가 살아 있어 그 뜻을 잠시 접어두었다.

 

1912년 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속리산 갈평리(葛坪里: 충북 보은군 마로면)로 이거했다. 이곳에서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에 따라 충남 대덕군(大德郡) 진령면(鎭岺面) 송정동(松亭洞)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18년 10월 모친상에 이어 두 달 만인 12월 광무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르고 아침ㆍ저녁으로 망곡(望哭)하며 세월을 보냈다.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에 이르자 자결의 결단을 내렸다.

 

1920년 12월 20일(음력) 저녁, 이명우와 권성 부부는 자식들을 물리치고, 독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식들이 가서 보니 이미 순절했고 이들의 머리맡에는 약 사발이 놓여 있었다. 이명우는 자결하면서 비통사(悲痛辭)와 경고(警告), 유계(遺戒)를 남겼다. 그가 남긴 글에는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명우가 가는 길이 '충의(忠義)의 길'이었다면 그의 부인 권성의 길은 충의를 행하는 지아비에 대한 '의부(義婦)'의 길이었다. 권성은 남편을 따라가며 네 통의 한글유서를 남겼다. 이 유서 가운데 아들 삼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따라 가겠다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듯이 부부 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義婦(의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은 이명우 부부의 자결 순국이 갖는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부부가 함께 자결순국한 유일한 사례이며, 권성은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자결순국한 여성인 동시에 한글유서를 남겨 독립운동사와 국문학적 사료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면서 안동지역에서는 10명의 자결순국자가 배출되었는데 류도발ㆍ류신영과 같이 부자(父子)가 자결한 사례에 이어 부부가 함께 자결한 사례까지 발굴되어 3.1운동 90주년을 맞는 후손들에게 그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in뉴스(www.kbin.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명우, #권성, #부부자결순국, #퇴계, #경북IN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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