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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멘스 교수의 '다수의 폭정'이란 글이 본보 석간에 역재(번역돼 실림)되고 있거니와, 동씨의 논거에 의하면 '다수결의 폭정'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설을 보는 한국의 다수당은 아전인수로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동씨의 주장 속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즉 '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자기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요, 바꾸어 말하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 당파에 속하지 않은 투표자도 만일 부정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재빨리 다수당을 소수당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처럼 투표자가 자유로이 자기 의사를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만일 투표자가 어떤 권력에 눌려서 그 의사를 맘대로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이라 한다면 허멘스 교수의 다수결 원칙은 근거가 와붕(瓦崩)되고 마는 것이다. 인민이 '성숙'되지 못하고 또 그 미성숙사태를 이용하여 가장된 다수가 출현된다면 그것은 두말없이 '폭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런 논점은 허멘스씨의 견지에서 본다면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할 터이지.

그렇기 때문에 동씨는 '질서 있는 다수당'이라든가 '진정한 다수의 지배'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니 다시 말하면 가장된 다수의 폭정은 실상인 즉 틀림없는 '소수의 폭정'이라고 단정할 것이 아닌가.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다수결의 원칙이 '관용' '아량' '설득'에 기초한다는 정치학적 논리가 문제가 아닌 것이요,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의 원칙일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여적'>

1959년 오늘 경향신문사에 들이닥친 경찰,
2009년 어제 칼라TV 압수수색 벌인 검찰

올해 1월 출판된 '여적'
 올해 1월 출판된 '여적'
ⓒ 경향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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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50년 전 글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오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우리 언론사(言論史)에서 너무나 유명한 필화를 일으킨 <경향신문>의 여적 전문이다. 이 글로 <경향신문>은 폐간을 맞았다.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 글처럼 자유당 정권은 4·19 혁명으로 몰락했다.

이 글이 신문에 실린 다음날인 1959년 오늘(2월 5일) 벌어진 일 또한 '오늘'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꼭 50년 전에 신문사로 들이닥친 경찰들이 여적 필자를 찾는다며 편집국을 들쑤시고 다녔다. 2009년 2월 4일에는 검찰이 칼라TV에 들이닥쳐 용산 참사 생중계 원본을 찾는다며 압수수색을 벌였다.

'진정한 다수' 반대하는데, '결국은 다수결'이라고?

여적이 지금과 '통'하는 이유는 어제의 다수결 원리와 오늘의 그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일어난 일만 봐도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수많은 촛불을 통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말 또한 열린우리당을 통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한나라당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여적의 법칙'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언론 관계법 개정을 어떻게든 밀어붙이려는 모양새가 그러하다. 대통령이 '원탁'에서 "하루 하루가 급하다"며 속도전을 주문하는가 하면, 이에 화답하듯 한나라당 대표들은 '결국은 다수결'만 외치고 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2일 <연합뉴스>를 통해 그렇게 말했고, 홍 원내대표 역시 3일 국회 연설에서 "소수의 폭력이 지배하는 의회라면 왜 모든 정당이 선거 때마다 다수당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느냐"는, '다수결 원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을 공언하기까지 했다. '진정한 다수'가 반대하고 있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최근 여론조사 결과들만 보자. <시사인> 설특집호에 언론관계법 개정 반대 의견이 63.8%로 찬성한다는 의견 28.0%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 여론조사 결과도 비슷했다. 반대가 57.7%, 찬성은 31.4%였다. 심지어 보수신문으로 분류되는 <세계일보>가 창간 20년을 기념해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서도 반대의견이 55.4%로 찬성의견 28.1%를 압도하고 있었다.

'가장된 다수 놀음'을 그만하라

진정한 다수가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이 아니란 걸 보여준 2008 촛불
 진정한 다수가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이 아니란 걸 보여준 2008 촛불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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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진정한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속도전'과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여적'은 확실하게 규정했다. "가장된 다수의 폭정은 실상인 즉 틀림없는 '소수의 폭정'"이라고 말이다.

작년 촛불 정국 와중에 우리나라에 온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조용한 독재보다 시끄러운 민주주의가 낫다"고 했다. '여적'의 정의 그대로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의 원칙"이기 때문에 또한 그러하다. 그것이 '시끄러운 민주주의'의 역사다.

그러니 '시끄러운 민주주의'를 마스크로 질식시키려 하지 말라.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1959년 '여적'의 예언은 2009년 오늘까지 적중할지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맞아 떨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속도'만 올리려다, 자칫 '잃어버린 50년'이 될 수도 있다.

'가장된 다수 놀음'을 이제 그만 하라. 


태그:#여적, #경향신문, #언론법, #필화,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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