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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금)일. 티 하나 없이 맑은 하늘, 백록담 정상에서 바람

성판악안내소→진달래밭대피소→백록담→진달래밭대피소→성판악휴게소→중문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깨워 밥을 먹었다. 산행을 해야 하는 긴 거리 때문에 겨울엔 낮 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은 밥을 달게 먹지도 않고, 민박집을 비워야 하기 때문에 짐을 정리해 나가야 하는데, 굼뜬 행동으로 시간을 지체했다.

 

마음에 조바심과 짜증이 났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짜증이 나는 순간 그것은 고행이 되고 만다, 돈과 시간까지 투자한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과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 삶이 행복하다. 지시하고, 되지 않은 일에 짜증내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삶이 황폐해진다. ‘그래 한라산 산행을 하는 날이야. 그래도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경건하고 밝은 모습으로 가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과 약속 때문에 먼저 나가는 용을 보내고, 우리는 6명이 한 택시에 탔다. 날이 아주 맑다. 중문에서 성판악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40여 분이 넘게 달리는 동안 해안이 아닌 중산간지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지금도 억새가 탐스러운 모습으로 피어 있고, 나무들도 비쩍 마르기보다 금방이라도 물이 오를 듯이 탱탱한 모습이다.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기사님은 매달 한 번은 백록담에 오른다며 이번 일요일에 12번째 다녀왔다고 했다. 순한 인상에 피부가 맑다. 차창 밖, 맑은 하늘 사이로 두껍게 흰 눈을 쓴 백록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보였다.

 

정상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먼발치에서 보고만 만 듯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저 곳이 우리가 가야 할 정상이야’라고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무심하다. 한라산에 노루가 아주 많아져 도로에 갑자기 뛰어나와 교통사고의 원인이 되고, 농작물에 피해를 많이 준다고 한다. 나도 늦은 시간에 운전하면 도로에서 마주치는 들짐승들 때문에 당황스러운 적이 많은 것으로 봐서 초식동물의 포식자가 사라져 버린 먹이사슬균형파괴는 전국적인 현상일 것이다. 지금, 호랑이 없는 산중에 멧돼지가 왕이다.

 

성판악안내소 입구에는 많은 차량과 등산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안내소 앞에 서니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차량에 한해서 주차료를 받았다.

 

 

눈이 쌓여서 다져진 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여름에 옆으로 퍼져 활발한 생명활동을 했을 윤택한 파란 나뭇잎이 축 늘어져 서서 잠자는 듯하다. 출발해서 30분 정도 모두 무리 없이 잘 갔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차가 가듯이 열을 지어 가게 되는데, 시영이가 자꾸 처져서 무리지어 가는 대열의 속도를 떨어뜨렸다.

 

체력을 염려했던 영석이는 오히려 앞으로 빨리 가지 못해 조바심이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상관없지만 일단 출발한 이상 마칠 때까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성판악에서 정상까지는 총 9.6km 정도로 강한 근력이 필요한 힘든 구간은 없다. 지루하다고 할 수 있는 긴 산길을 5시간 정도 꾸준하게 걸을 수 있는 인내심이 있다면 누구나 정상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잘 정비된 길이 단조롭기도 하지만 주변 풍광을 충분히 즐기면서 가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성판악코스는 전체 여정이 긴 만큼 오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과 간식을 찾으며 시영이가 자꾸 느려졌다. 끊임없이 무리지어 오는 사람들이 시영이를 앞서가기 시작했고, 저녁에 열이 심했던 종우는 말없이 눈에 자꾸 앉으며 힘들어 했다.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시간확보를 어렵게 해서 겨울산행에 치명적이다. 약수터를 지나면서 다른 아이들을 진달래밭대피소까지 먼저 가게 했다. 점점 더 느려지는 시영이를 뒤에서 채근하며 드디어 대피소에 도착했다. 성준이가 달려와 시영이를 얼싸안고 반겼다. 아이들은 40분 정도를 기다렸다고 했다.

 

 

우와!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했다. 바람도 없이 날이 포근했다. 낮은 곳에 하얀 뭉게구름이 깔려 있고, 그 위로 하늘은 티 하나 없이 맑아 미치도록 푸르렀다. 나무엔 상고대가 맺혀 아름다웠다. 겨울 산에서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날씨가 좋았다. 대피소는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컵라면을 사서 밖에서 먹었다. 라면발을 입에 문 채 서로 눈이 부딪치면 말없이 웃는다. 서로가 대견하게 생각되고, 멋있는 경치를 보는 경이감과 언 몸에 들어가는 따뜻한 국물이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도 대단하다. 밥 대신 가져온 빵을 나눠먹으며 우리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전체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발이 아픈 시영, 감기에 시달린 종우, 약한 체력으로 힘들어 하는 영석이는 바로 내려가고, 성준, 우철, 성은 정상에 최대한 빠른 시간에 다녀와 성판악휴게소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다.

 

 

대피소에서 정상까지는 2.3km 정도이니 90분 정도의 시간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올라갈수록 하늘은 눈이 시리게 푸르렀고, 상고대는 더 크게 맺혔다. 많은 사람들이 긴 시간 산행으로 무거워진 다리를 한발 한발 백록담으로 옮기고 있었다. 눈과 상고대 때문에 말 그대로 정상은 백색세상이 되어 다가왔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허락한 자연과 이것을 본 우리가 고마워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대피소에서 먼저 간 일행과 만나야 해서 내려오는 길은 최대한 서둘렀다. 전체가 올랐으면 관음사코스로 하산하려 했다. 이번에는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우철이 엄지발가락 윗부분이 아프다며 자꾸 늦어졌다. 급한 마음에 안 아픈 사람은 없다며 계속 빨리 걸을 것을 닦달했다.

휴게소에 도착하니 먼저 온 아이들이 반갑게 손짓하며 맞아 주었다. 아무 일 없이 산행을 마친 우리가 대단하고, 고마웠다. 이어 먹은 국수가 맛있다.

택시로 다시 중문 민박집에 왔다. 피곤해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짐을 다시 풀 수 있도록 다행히 방이 하나 났다.

 

  “저녁은 뭐 할 거예요?”

  ‘김치찌개.’

  “우와! 우리가 그제 저녁에 뭐 먹었죠?”

  ‘김치찌개.’

  “어제 아침은요?”

  ‘김치찌개.’

  “어제 저녁은요?”

  ‘김치찌개.’

  “오늘 아침은요?”

  ‘김치찌개’

  “그래도 또 김치찌개요?”

  ‘그럼, 지금까지 잘 먹었으니 계속 먹어야지.’

 

저녁에 마트에서 당근, 감자, 버섯, 양파, 돼지고기를 사서 카레를 해먹었다.


태그:#DAUM,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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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놀게하게 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초등학교교사. 여행을 좋아하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파행적인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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