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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수)일. 흐리고 제주에서 간간이 가는 비가 내림

목포→제주항→용두암→용두암 해안도로→도두봉→하귀→하월해안도로→애월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떴다. 집을 떠나는 날이면 가벼운 흥분과 함께 준비할 물품을 챙겨야 할 시간만큼 빨리 일어나게 된다. 식구들과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그 시간이 서로의 정을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제 자전거 펑크를 때우고, 짐받이를 달았으니 가장 중요한 일은 해결됐다. 겨울이니 바람과 간간이 내리는 비를 견딜 수 있도록 옷에 신경 써야 한다. 한라산 등반에 필요한 아이젠까지 챙기다보니 수영복과 햇볕에 피부가 타는 것에만 신경 쓰였던 여름보다 짐이 훨씬 무거워졌다. 땀을 많이 흘러 체력소모가 심한 여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겨울자전거여행을 아이들이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도 배표를 예약(21일)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졌다. 일단 가서 부딪히는 것이다.

 

준비한 짐을 싣고, 집을 나서 목포한빛초등학교 정문으로 갔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보기로 한 박용을 제외하고, 모두 제시간에 모였다. 그 동안 매월 한 번씩 계속 자전거를 탔던 친구들은 문제가 없지만 처음 나타난 영석이는 접이식인데다 바퀴도 작은 자전거여서 속으로 걱정이 많이 되었다. 또, 참가를 늦게 결정하는 바람에 표를 구하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6학년을 끝내는 선물을 꼭 해주고 싶었다. 서로 같이 도우며 격려하는 친구들 때문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 아닌가? 출발하려니 우리 반 여학생들이 배웅했다.

 

‘너희들 방학 첫 날이니 늦잠을 실컷 자야지 왜 나왔어?’ 속으론 반가우면서도 불퉁스럽게 내뱉자.

 

“제주도 간다며 종우가 배웅 나오라잖아요.”

 

그렇다. 아무런 사심 없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친구 사이다. 이 친구들이 고맙다.

 

무슨 일이든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하다. 복잡한 사거리교차로를 지나고, 차에 신경 쓰며 목포여객선터미널까지 오가는 길은 아주 긴장되는 순간이다. 인도에 있는 자전거도로를 이용해서 도착했다.

 

예약된 배표를 구입하고, 박용을 만나 우리는 모두 모였다. 같이 자전거여행을 하려다 자동차여행으로 바꾼 최보라 일행도 만났다. 배표에 인적사항을 쓰고, 개찰구를 통해 ‘퀸 메리’호에 탔다. 어린이들이 무거운 자전거를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같이 배를 타는 어른들이 도와줘서 수월한 일이 되었다. 승무원들이 여름여행 때, 봤던 분들이라 낯이 익다. 모두가 친절하다.

 

3등실 401호에 짐을 두고, 여행자보험에 가입하고, 입금처리를 했다. 전체 여행경비에 비해 아주 작은 금액이고, 사소한 일이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꼭 해야 될 일이다.

 

목포는 항구다. 배는 기적을 울린 후, 그 큰 덩치를 격렬한 물살로 부두를 밀어냈다. 배는 항구에서 멀어지고, 강을 따라 가듯 가까이 있는 산과 들을 보며 물길을 달렸다. 진도를 벗어나기 전까지 2시간 정도 이런 경치는 계속된다.

 

식당에 모여 창 밖 경치를 즐기며 맥주를 마셨다. 술은 어디서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게 만들지만 배에서 마시는 술은 여행을 재미를 더한다. 배에 오르자마자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던 얘들을 오라고해 점심을 시켜먹었다. 체력소모가 심해 밥 먹을 것을 권했지만 맨 날 먹는 밥이라며 돈가스와 우동을, 어른 2명은 김치찌개를 시켰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도 없지만 흐린 날이다. 진도를 벗어난 배는 망망대해를 달리다 추자도가 보이고, 배 뒤로 사라질 쯤 제주가 육중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라산은 하얗게 눈을 쓰고 있었고, 바다 가까이는 검은 모습으로 점점이 건물들이 박혀 있는 제주시가 보였다.

 

 

배에서 내려 전체 사진을 찍고, 14시 20분부터 자전거에 올라 길을 밟았다. 용두암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용머리가 아니라 토끼머리가 돼버렸다는 제주사람의 말처럼 볼 때마다 작아진다. 예전에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것 같은 위풍당당함은 사라졌다. 끊임없이 바람과 물에 씻기며 부서져서 점점 왜소해진 것이다. 결국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물은 바위에 부딪혀 갈라지지만 흘러 다시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한 번 갈라진 바위는 절대 다시 하나가 되지 못한다. 계속 갈라질 뿐이다. 포용을 잊어버리고, 힘으로만 밀어붙여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지금의 정국은 바위가 쪼개지기 전의 아우성과 같다.

 

 

공기는 따뜻하고, 바람도 기분 좋게 살랑거리며 살갗을 스친다. 하지만 날은 잔뜩 흐리고, 간간이 가는 비가 얼굴을 때린다. 왼쪽으로 제주공항에 덩치 큰 비행기들이 쉴 새 없이 뜨며 내리고, 한라산은 하얀 눈을 쓰고 웅크리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검은 바위 너머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다.

 

갈라지는 길에서 언제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애써 해안으로 달렸다. 오른쪽으로 도두봉을 뒤로 하고, 이호해수욕장을 지났다. 여름에 그렇게 부산하던 왁자지껄함은 사라지고, 고즈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게 모래와 바다만 남았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손님이고, 자연이 주인이다.

 

하귀해안도로를 따라 애월을 향해 가는데 영석이가 자꾸 처지며 힘들어 했다. 앞으로도 힘들어 할 것이다. 어찌됐든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전체 속도는 가장 늦게 가는 사람이 결정한다. 늦게 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대책이 필요하다. 길눈이 다음에 맨 선두로 가게 하고, 쌀과 김치를 가장 먼저 비워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해줘야겠다.

 

하귀농협하나로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샀다. 길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간식거리 하나 없이 그냥 오는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 봤다. 애초에 목표는 여름에 민박을 하였던 협재해수욕장까지였으나 애월항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었다.

 

전에 머물던 민박집에 들르니 방이 없다고 해서 잔디가 깔린 운동장이 있는 ‘마린펜션’에 왔다. 금방 어둠이 찾아와 다들 배고프고, 피곤하다며 아우성인데 전기밥솥의 밥이 더디다. 찬거리로 준비한 돼지고기, 두부를 넣은 김치찌개에 모두 밥을 달게 먹었다.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 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술을 사러 나갈 여력이 없었다.

 

나는 먹고 나니 온 몸에 한기와 피곤함이 몰려와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웠다.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씻고, 장난치고, 재잘거린다.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2월 24일부터 29일까지의 겨울제주자전거여행과 한라산등반 기록입니다.


태그:#DAUM,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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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놀게하게 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초등학교교사. 여행을 좋아하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파행적인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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