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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웬 설거지?"

"오늘 저녁 맛있게 잘 먹어서 보답하는 거야."

"그냥 놔둬, 내가 할게."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내가 마저 할게."

 

남편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누가 찾아와서 현관에 잠깐 나갔다 들어 온 사이, 밥을 다 먹은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너무 의외의 일이라 난 조금은 놀랐다. 남편이 그렇게까지 말하기에 나는 못이기는 척,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그 찌개가 맛이 있는 이유가 따로 있지"라고 했다. 남편은 "무슨 이유?"하며 묻는다.

 

18일, 난 손자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손자는 집에 있으면 퍼즐게임이나 색칠공부를 하다가도 컴퓨터나 TV를 틀어 달라고 하기가 일쑤다. 또 녀석을 데리고 있는 동안 여러 가지 구경도 시켜주고 안 했던 일들을 같이 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니 조금은 쌀쌀했지만 그래도 걸을만 했다.

 

목적지는 돼지고기를 파는 광명4거리 이마트. 4살짜리 녀석에게는 먼거리다. 과연 거기까지 걸어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조금 되었지만 그래도 걸으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정 못걸으면 잠깐씩 안아주거나 업으면 돼지 하면서.

 

추워서 잘 걷지 못한다는 손자에게 난 "우협아 많이 걸어야지 건강해져, 그리고 움직이면 추운 것도 도망가"하니깐 녀석도 할 수 없는지 쫓아온다. 집에서 12시 30분쯤 나가서 돌아온 시간은 2시 50분이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녀석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잘 쫓아왔다. 걷는 동안 녀석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녀석의 손을 잡고 이마트에 가서 돼지고기와 우유, 파래 등 가벼운 식품 몇 가지만 사왔다. 손자를 데리고 가는 거라 처음부터 여러 가지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돼지고기 찌개를 하게 된 이유는 거의 2주일 동안 감기가 걸려 고생하던 남편이 회복기에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멸치만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좋아한다. 하여 만만하게 멸치 김치찌개를 자주 끓여 먹곤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여기에 돼지고기를 넣고 끓이면 더 맛있을 텐데"하며 아쉬워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파래무침을 하면 저녁반찬으로는 손색이 없을 듯했다.

 

집에 돌아와 손자와 조금 놀다가 주방으로 가니 녀석은 "할머니 나하고 더 놀자"한다. "이젠 밥해야지"하니깐 녀석은 "할아버지 일하고 오면 밥주게?"한다. "음 우협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하니 "음 나 대단하지"하며 나를 한번 더 웃겨준다.

 

녀석은 요즘 하루하루가 다르게 말을 잘한다. 하여 녀석하고 제법 이야기도 통하고 심심할 새가 없을 정도다. 녀석에게 TV 만화를 틀어주고 "할머니가 빨리 할게"하곤 김치찌개를 끓일 준비를 서둘렀다.

 

 

김장김치를 잘게 썰어 꼭 짰다. 그리곤 고추장과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였다. 남편은 김치가 물렁물렁하게 익어야 좋아한다. 40분 정도 끓이다가 양파, 파,마늘, 후추,고추가루를 넣고 다시 한 번 푹 끓여주었다. 김치가 남편이 좋아 할 정도로 푹 익었다.

 

찌개가 끓는 동안 파래무침을 했다. 파래를 씻어 물기를 꽉 짰다. 간장, 소금, 깨소금, 식초약간, 파, 마늘, 고추가루, 설탕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거기에 무채를 썬 것을 먼저 무친 뒤 파래를 넣고 함께 무쳤다. 어느새 봄내음이 나는 듯했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이 코를 끙끙거리면서 식탁에 앉는다. "음 돼지고기 찌개를 했네"하며 국물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맛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거야?"하니 마지못해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한다.

 

밥을 차려주고 난 손자에게 밥을 먹이느라 남편이 먹는 것에 신경쓰지 못했다. 그런데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직접 밥통에서 밥을 더 갖다먹는다. 난 모르는 채 했다. 평소 같았으면 "나 밥 더 줘"했었을 텐데. 그런데 설거지까지 하고있으니 내가 놀랄 수밖에.

 

그런 남편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참 많이 늙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세월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남편이 저만큼 늙었으니 나도 저만큼 늙었겠지.


태그:#돼지고기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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