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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는 1번이 갔다 왔으니까 오늘은 2번이 갔다 와. 가서 담배 한 갑하고 피로회복제 좀 사와."

고교시절 키가 작다는 이유로 반에서 1, 2번을 배정받았던 나와 내 짝꿍은 맨 앞에 앉아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맨 앞자리 중에서도 하필이면(?) 칠판 중앙에 놓여져 있던 교단 바로 코 앞자리여서 오죽 눈에 잘 띠겠는가. 더군다나 교과과정 중 중요한 부분의 진도가 나갈 때면 선생님들의 열강이 시작되고, 열강을 하면서 입에서 분출(?)돼 나오는 새하얀 침 덩어리는 고스란히 나와 짝꿍에게로 집중 분사되었다.

어떤 때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졸다가 파편에 잠을 깬 경험이 있을 정도로 탁자 앞 맨 앞자리는 가장 좋지 않은 자리였다. 특히, 정규 수업이 끝나고 야간 자습이 시작될 쯤 되면 하루종일 목을 꼿꼿이 들어 선생님을 쳐다봐야 하는 자리의 특성상 목디스크가 찾아오기도 십상인 경우가 많았다.

실과 바늘처럼 고교 3년을 같이했던 나와 짝꿍

무슨 악연인지 우연인지 나와 내 짝꿍은 운명처럼 고교생활 3년을 내내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녔고, 다른 애들 잘 자라는 키도 나와 내 짝꿍은 3년 내내 그 키여서 앞 번호를 독차지했다.

그나마 1학년 입학당시에는 둘 다 10번 대까지 갔었는데,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아 학년이 높아질수록 나와 짝꿍의 번호는 점점 앞 번호로 이동했고 결국 3학년 때에는 더 이상 이동할 수도 없는 반에서 1, 2번을 달기에 이르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하자”고 짝꿍과 다짐을 했지만 현실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앞 번호이다 보니 무엇을 하든 간에 가장 먼저 해야 했고, 심지어 매를 맞을 때도 가장 먼저, 예방주사 맞을 때도 제일 먼저, 아무튼 모든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누가 말했던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말이 전혀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장 먼저 맞는 매는 강도면에서 힘이 빠지지 않은 최상의 컨디션에서 때리기 때문에 제일 아프다. 뒤로 갈수록 오히려 때리는 사람이 힘이 빠지기 때문에 덜 아프고 또 그렇게 보였다.

이렇듯 앞 번호, 앞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와 내 짝꿍은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 전날 술이라도 먹고 수업 들어오면 잔심부름 비상 걸려

"오늘은 자습해라. 선생님이 몸이 안좋아서 그러니까. 오늘 못한 수업은 이따가 저녁 자습시간에 보충해 줄테니까."

자습을 시켜놓고 담임 선생님은 교실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업무탁자에 앉아 다른 일을 보고 있다.

'이상하다. 오늘따라 왜 안 부르지?'

나와 짝꿍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분명 전날 술을 먹고 왔다면 ‘약사와라, 담배 사와라, 뭐 사와라’ 하면서 시킬 게 분명한데 조용한 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심부름 안 시킬라나 본데? 공부나 하자."

짝꿍과 소곤거리며 말을 마치고는 공부를 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담임이 부른다.

"1번 일루 와봐."
"네."

짝꿍이 짤막한 대답을 하고 이내 담임에게로 다가간다. 담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지폐돈을 몇 장 꺼냈다.

"약국가서 위장약 좀 달라고 해서 사와."
"지난번에 제가 갔다왔는데요 또 가요?"
"그래? 알았어 그럼. 2번 이리와."
"예."

믿었던 짝꿍이 배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냥 갔다 오면 될 것을 자기가 안 가면 나를 시킬 걸 알면서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짝꿍이 미워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둘이 심부름을 도맡아하니 그리 서운할 것도 없었다.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그렇게 해서 난 담임으로부터 돈을 받아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약을 사가지고 다시 교실로 들어와서 담임에게 약을 건네고 자리로 들어오는데 짝꿍이 자리에 없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뒷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어디갔냐고 물었다.

"너 약국 간다고 나간 뒤에 바로 담임이 또 불러서 교무실에 뭐 가지러 갔어."
"그래?"

잠시 후 교무실로 심부름을 갔던 짝꿍이 돌아왔고, 나와 짝꿍은 서로를 보며 실소를 보였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나와 짝꿍은 불만을 터트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용기를 내어 담임에게 한 가지 건의하기로 했다.

담임 선생님한테 용기내서 찾아 갔지만

업무책상에 앉아있던 담임에게도 다가간 나와 짝꿍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담임 앞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얘기를 꺼내기로 말을 맞추었지만 막상 앞에 서자 주눅들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선생님!"
"왜? 할 말 있어?"
"저기요."
"뭐야. 얼른 얘기해."

나와 짝꿍은 서로 눈치만 보고 정작 할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난 드디어 말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구요. 심부름은 저희가 계속할 테니까요 자리를 뒤쪽으로 옮겨주시면 안될까요?"
'앗!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미 짝꿍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쟤 뭐야?’하고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뒤로 가고 싶어? 이유가 뭐야?"
"별다른 이유는 없고요 그냥 뒤에 앉고 싶어서요."
"이유도 없이 그냥 옮겨달라는 거야? 뒤로 가서 떠들려고 그러지?"
"그건 아닌데요."
"그냥 앉아있어. 다음에 자리 바꿀 때 되면 바꿔줄 테니까."
"네."

하려고 했던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뒷자리로 옮길 이유도 많은데 그 또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나와 짝꿍은 자리로 돌아왔다. 바뀐 건 하나도 없었다. 담임에게 건의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나중에 자리 바꿀 때 되면 바꿔준다던 담임의 말과는 달리 결국 나와 짝꿍은 대입시험 볼 때까지, 아니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담임의 심부름을 하며, 선생님들의 침받이를 하며 그렇게 보냈다.

누군가 나에게 ‘다시 학창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하고 질문을 한다면 난 주저 없이 고교시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키 때문에 차별 아닌 차별을 받으면서 보낸 고교시절이지만 그 때 만큼 많은 친구를 사귀고, 또 속까지 다 내어줄 정도로 깊이 있는 우정을 만들었던 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고교시절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고교 3년을 실과 바늘처럼 떨어지지 않고 질긴 인연을 같이 했던 내 짝꿍을 비롯해서 보고싶다 친구들아!

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글



태그:#고교시절,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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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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