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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 마을에서 생산되었던 항아리들이다. 구억리 노인회관 뒤에 전시되어 있다.
▲ 전통 항아리 과거 이 마을에서 생산되었던 항아리들이다. 구억리 노인회관 뒤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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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억리(九億里)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현(現) 상동부락(上洞部落) '구석밭'이라고 부르는 곳에 조씨(趙氏), 문씨(文氏), 양씨(梁氏) 등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구억리는 토질이 박해서 대정읍의 다른 마을과 달리 농사가 잘 되지 않는 마을이다. 처음에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은 옹기를 만들어 제주도 전역에 공급하면서 삶을 지탱했다.

과거에 이 마을에서 옹기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지판
▲ 안내 표지 과거에 이 마을에서 옹기를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지판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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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처음 마을에 정착한 곳은 당시 안성리(安城里) 상동(上洞)이었다. 그러다가 1915년 에 이르러 마을이 안성리(安城里)에서 분촌(分寸)되어 구억리(九億里)라는 독자적인 마을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구억리(九億里)라는 마을 이름은 '구석밭'을 한자로 표기해서 만든 것이다.

척박한 환경이 마을을 옹기 중심지로 만들어

조선후기 이후부터 마을에 귤나무가 도입될 때까지, 구억리는 제주 옹기산업의 중심지였다. 이 마을이 옹기산업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농경지가 부족하다는 점 외에도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다.

구억리 뒤에 넓게 상록수림이 분포한다. 이로 인해, 도자기를 굽는 데 필요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 상록수림 구억리 뒤에 넓게 상록수림이 분포한다. 이로 인해, 도자기를 굽는 데 필요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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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배후에 넒은 산림지역이 있어서, 가마에서 옹기를 굽는데 필요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있고, 인근 신평리나 무릉리 등지에서 옹기제작에 적합한 흙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또,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사계리 포구나 모슬포가 있어서, 제주도 전역으로 옹기를 운반하기에도 적합했다.

지금도 구억리에는 도자기를 구웠던 검은굴과 노랑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검은굴이란 검은 옹기를 구웠던 가마굴을, 노랑굴이란 노란 옹기를 굽던 굴을 말하는데, 이 마을이 한때 제주도 요업의 전성을 이루던 곳임을 짐작하게 하는 증거물들이다.

옹기를 구던 가마터다. 검은굴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가 작다.
▲ 검은굴 옹기를 구던 가마터다. 검은굴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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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확인해본 결과, 검은 굴은 규모가 작고 내부가 돌로 되어 있는 반면, 노랑굴은 길이가 길고, 굴 내부 천정에는 흙을 빚어서 만든 흔적이 있다. 노랑굴에 인공적인 요소가 더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노랑굴이 나중에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가 노랑굴을 방문하고 오는 길에, 마침 근처에 있는 밭에서 돌을 깨고 계신 박근호(79) 할아버지를 만났다. 박 할아버지는 노랑굴 근처에 살고 계시는데, 알고 보니 이 마을에서 대를 이어 옹기를 굽던 기술 전수자셨다.

어릴 때, 우리 집에 있던 쌀독, 물항아리, 물허벅 등도 박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 할아버지로부터 옹기를 제작하던 일에 대해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박 할아버지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말씀을 조리있게 잘 하셨다.

이 마을에서 마지막까지 옹기를 굽던 책임자였다. 박할아버지로부터 이 마을 요업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다.
▲ 박근호 할아버지 이 마을에서 마지막까지 옹기를 굽던 책임자였다. 박할아버지로부터 이 마을 요업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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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프고 위험이 뒤따르는 일

이 굴에서 도자기 생산은 '굴제(굴계)'라고 부르는 계가 담당했는데, 박 할아버지의 선친인 박창진님이 계를 이끌던 계수이셨다. 박근호 할아버지는 11남매 중 막내였는데, 형님들이 일본군으로 징용을 가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6학년으로 중퇴하고 부친을 따라다니며 도자기 굽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굴제는 총 책임자인 계수 1인, 계수를 보좌하고 계수가 없을 때 그 책임을 떠맡는 공원 1인, 그리고 계수와 공원의 지시대로 일을 하던 예닐곱 명의 소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옹기를 굽던 가마터인데, 보존이 잘 되어 있다. 검은 굴에 비해 규모가 크다.
▲ 노랑굴 옹기를 굽던 가마터인데, 보존이 잘 되어 있다. 검은 굴에 비해 규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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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를 굽는 일은 힘들고 위험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계수는 설명절과 추석명절이 되면, 돼지를 잡아서 공원과 소임들에게 나눠주며 사기를 높여 주었다. 당시는 좀체로 고기를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계수의 이 같은 행위가 계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흙을 퍼오고, 계원들의 품삯을 지불하는 등 옹기 생산에 필요한 비용은 화주가 부담했는데, 그 화주들도 대부분 구억 사람들이었다. 옹기를 생산할 때, 날씨에 따라서 좋은 옹기가 나오기도 하고, 질이 떨어지는 옹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화주가 운이 좋으면 좋은 옹기가 생산되는 것이었다.

당시 가마 가득 옹기를 굽는다면 한 차례에 생산되어 나오는 양이 7마차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차 한 대에 대략 옹기 70-80개를 실었다고 하니, 500여 개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만약 구워 나오는 옹기의 수량이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면, 그 비용을 부담한 화주는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망해서 폐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굴 내부에 흙을 발랐던 흔적이 보인다.
▲ 노랑굴 내부 굴 내부에 흙을 발랐던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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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만들어졌던 옹기는 항아리, 물허벅 등이었다. 항아리는 주로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던 용도였다면, 물허벅은 샘에서 집까지 물을 운반하는 용도였다. 옹기를 구울 때는 2단으로 쌓고 구웠는데, 아래쪽에서 굽는 옹기를 알통개라고 하고, 그 위에서 굽는 옹기를 웃통개라고 불렀다. 같은 크기의 옹기라도 알통개가 웃통개보다 두께가 두꺼웠다, 구울 때 웃통개의 무게에 눌려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알통개에 흙을 더 두껍게 발라야했던 것이다.

마차에 옹기를 싣고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녀

옹기를 운반할 때는 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 만들어진 옹기는 마을 주민들 중 비교적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의 몫이었다. 옛날이라 마차를 소유할 만한 형편이 되는 집도 몇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마차에 옹기를 싣고 화주와 함께 제주도 도처로 옹기를 팔러 나갔다.

옹기 열 개를 한 줄이라 하는데, 마차 수송에 익숙한 사람은 보통 한꺼번에 8줄(옹기 80개)을, 미숙한 사람은 6줄(옹기 60개)을 실었다. 동산을 오르다가 소가 지쳐서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날에는 옹기가 깨지기 일쑤였다. 길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운반 도중 사고라도 나면 화주는 큰 재앙을 맞은 것과 같았다.

옹기 운반에 나섰던 마차 주인들이 돌아올 때는 빈 마차로 돌아오지 않고, 보통은 쌀이나 보리를 싣고 왔다. 돈이 귀했던 시절이라 옹기를 돈 대신에 곡식과 교환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화주는 마차 주인에게 돌아오는 운임을 곡식으로 별도 지불했다.

구억분교장 옛터에 흙이 쌓여 있었다. 옹기를 굽는데는 진흙이 필요하다. 과거 주민들은 진흙을 이웃 신평마을에서 구한 후, 마을로 운반했다.
▲ 흙 구억분교장 옛터에 흙이 쌓여 있었다. 옹기를 굽는데는 진흙이 필요하다. 과거 주민들은 진흙을 이웃 신평마을에서 구한 후, 마을로 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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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호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울 때는 흙을 싣고 오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구억리의 현무암질 흙이 옹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옹기 제작에 들어가는 흙은 신평리에서 싣고 왔다. 노랑굴에서 옹기 굽는 일을 배울 당시는 매우 엄격한 규율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더 이상 옹기 굽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계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 귤이 보급되면서, 먹고살만해지나 아무도 옹기 굽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구억에서 요업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옛 구억분교장 터에 마을 청년들이 전통 옹기 체험장을 꾸미고 있다.
▲ 구억분교장 옛 터 옛 구억분교장 터에 마을 청년들이 전통 옹기 체험장을 꾸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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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이어 가려는 청년들의 노력

구억마을에는 폐교된 보성초등학교 구억분교장의 옛터가 남아 있다. 1995년에 보성초등학교와 통합되어 교육장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한 이 분교장이 지금은 제주 전통옹기를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전통옹기를 전시하고 그 제작과정을 일반에 보여주고자 마을 청년들이 이곳을 임대하여 전시장을 꾸미는 중이라고 한다. 방문해보니,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지 전시장은 문이 잠겨 있었다. 유리문 틈으로 그 내부를 들여다보니 옹기들이 옹기종기 전시되어 있었다. 마당에 흙과 장작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용기를 제작하기도 할 모양이다.

유리문 틈으로 내부를 들여다 보니, 전시장에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 전시 도자기 유리문 틈으로 내부를 들여다 보니, 전시장에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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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년들이 과거 조상들의 땀이 배어 있는 전통사업을 계승하려는 것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박근호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전통 요업에 대해 더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태그:#제주 전통옹기, #구억리, #노랑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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