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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 황궁의 정전. 군대 출정식과 개선 열병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 대정전. 심양 황궁의 정전. 군대 출정식과 개선 열병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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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대정전에서 북경 정벌 출정식이 열렸다. 일곱 살 복림이 중앙에 마련된 황제의 자리에 앉고 태황후 대옥아가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좌우에 섭정왕 도르곤과 우진왕이 범문정 등 대소신료를 거느리고 도열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물론 몽고 왕과 명나라에서 투항한 홍승주를 포함한 실력자들이 모두 자리를 함께했다.

두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도르곤이 황제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북경을 정벌하라."

가느다란 소년의 목소리이지만 황제의 명이다. 황명과 함께 양백기를 하사했다. 도르곤이 반 무릎을 꺾으며 대옥아가 대신 내려주는 깃발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묘한 감정이 흘렀다. 그 감정은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묘한 감정이었다. 깃발을 받아든 도르곤이 뒤돌아섰다.

"북경이 우리를 부른다."

도르곤이 깃발을 흔들었다. 우와와와! 군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북경이 거기에 있고 북경이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 우리는 북경으로 간다."

깃발을 흔들던 도르곤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가자 북경으로!"

또 다시 북소리가 울리고 8기군의 깃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팔기군의 전신 4기군 깃발. 정남기. 정백기. 정황기. 정홍기.
▲ 팔기군 깃발. 팔기군의 전신 4기군 깃발. 정남기. 정백기. 정황기. 정홍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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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여 나를 따르라."

백마에 오른 도르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양백기가 따랐다. 뒤이어 정백기, 양홍기 등 팔기군의 깃발이 뒤따랐다.

출정식을 마친 청나라의 최정예 팔기군이 남문을 빠져 나갔다. 백마를 타고 앞장서 나가는 도르곤을 바라보던 대옥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흘렀다.

"밤엔 저이가 황제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잘생기고 늠름한 저 사내를 지금처럼 부리고 싶다. 아~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것이 권력의 맛이란 말인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묘한 심리가 스멀거렸다. 가지고 싶은 보물을 어렵게 가졌을 때의 충족감과 독점욕의 발로일까? 드러내놓고 저 사람은 내 남자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보상심리일까? 남성권력에 대한 보복 심리일까? 대옥아는 이러한 심리 변화를 실행에 옮겼고 결국 도르곤을 주야로 부리다가 팽(烹)시킨 냉혈 여인이었다.

북경 정벌군과 행동을 같이 한 소현세자

심양을 떠난 청나라 군이 금주성에 도착하여 부대를 점검했다. 소현도 도르곤 막사 옆에 군막을 설치하고 본국에서 파견된 무사(武士)의 호위를 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도르곤이 세자를 대동하고 서부전선으로 출동한다는 급보를 받은 조정은 힘세고 건장한 무사 4명을 뽑아 급파했다. 허수·박형·김유·권주에게 노자로 은과 인삼을 주어 심양으로 보냈던 것이다.

명나라 총병 오삼계가 보낸 장수 2명이 서찰을 가지고 찾아 왔다.

"황성이 유적(流賊) 이자성에 의해 함락되었다. 황제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후와 비(后妃)는 모두 자결했다. 관내(關內)의 여러 성이 모두 유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오직 산해관만이 남아 있으나 급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귀국(貴國)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고자 한다."

 천하제일관 편액.
▲ 산해관. 천하제일관 편액.
ⓒ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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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가 보낸 사절을 융숭히 대접해 보낸 도르곤은 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산해관에 도착했다. '천하제일관문'이라는 편액을 이마에 붙이고 떡 버티고 서 있는 산해관을 바라보는 도르곤은 감회가 깊었다. 철웅성 산해관을 피해 북경에 입성하고자 장성 북쪽 산악을 그리도 올랐는데 이제는 모두가 헛발길이 되었다.

산해관 관문을 두고 두 세력이 마주했다. 지는 해 명나라와 떠오르는 해 청나라다. 오삼계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왔다. 도르곤과 오삼계가 마주 섰다. 도르곤의 뒤에는 범문정과 홍승주 용골대와 소현이 있었다. 오삼계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항서를 바쳤다.

항복서를 받아든 도르곤이 오삼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겼다. 허나 적을 대하는 살기등등한 눈초리가 아니라 연민과 애증이 교차하는 눈초리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현은 눈을 의심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숭정제는 몰라도 홍승주와 오삼계는 알고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조선의 선비들이 제일 흠모하는 인물이 문인 홍승주, 무인 오삼계였다. 특히 무과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이순신은 몰라도 오삼계는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지 46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잊혀진 장군이었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핍박을 받았지만 전사 후에도 백성들의 입에 거론되는 것을 차단당했다.

비록 선조 조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해 조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수사일 뿐, 일반 백성들에게 영웅시 되는 것을 조정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일대기를 다룬 <이충무공전서>가 그의 사후 197년이 흐른 1795년,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유득공이 편찬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가 증발했다. 누굴 믿고 의지해야 하나?

충신의 상징으로 존경받던 홍승주는 이미 항복해 청나라 사람이 되어 있었고, 명나라의 마지막 대들보 오삼계가 오랑캐의 장수 도르곤에게 항복서를 바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 오삼계마저 청나라에 항복하면 우리 조선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여 일어서야 하는가?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는 지금 이 순간 대륙에서 사라지고 없단 말인가? 최명길이 명과 내통하여 심양까지 끌려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되었단 말인가? 김상헌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명나라와의 의리는 누구와 지켜야 한단 말인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떠한 대안을 수립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오삼계가 성문을 열어젖히고 청나라 군을 맞아들였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다. 산해관 성문을 들어서는 도르곤은 감회가 남달랐다. 격전을 치르고 피의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이곳을 피하기 위하여 북쪽 산악을 얼마나 올랐던가? 이렇게 쉬 열리리라고는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노용두 초소에 있는 명나라군 석상. 결국 산해관을 수비하던 명나라군은 돌이 되고 말았다.
▲ 산해관. 노용두 초소에 있는 명나라군 석상. 결국 산해관을 수비하던 명나라군은 돌이 되고 말았다.
ⓒ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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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50리 지점에 이자성 반란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우리 부대가 열세입니다."

오삼계가 다급함을 토로했다.

"알았소."

오삼계를 안심시킨 도로곤이 호격을 불렀다.

"도적들에게 팔기군의 매운맛을 보여 주도록 하라."

호격이 부대를 이끌고 질풍노도와 같이 달려 나갔다. 얼마가지 않아 이자성 부대와 조우했다.

"도적을 공격하라."

호격의 명령과 함께 군사들이 튀어나갔다. 오합지졸이 뭉쳐있는 이자성 부대는 팔기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팔기군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자성 부대 군졸들의 목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이자성 부대는 5만 여의 시신을 남겨두고 물러섰다.

"한 놈도 남겨두지 말고 비적을 섬멸하라."

호격의 명이 떨어졌다. 팔기군의 기동력은 적의 퇴각마저 용서하지 않았다. 해구(海口)에 이르는 들판에 10만의 시체가 쌓였다.

촛불이 이렇게 강할 수 있느냐? 그 진상은 무엇이냐?

산해관을 포위하고 있던 부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자성은 긴급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오삼계의 부대는 손바닥에 촛불이라고 했던 놈이 어느 놈이냐?"
"등취앙입니다."
"그자를 불러오라."

등치앙이 불려왔다.

"오삼계 군대에 우리 군졸 10만을 잃었다. 오삼계가 갑자기 세질 수 있단 말이냐?"
"그 그 그것이…."

등취앙이 우물쭈물했다.

"이봐라, 뭣들 하느냐? 이자의 목을 쳐라."

그 자리에서 등취앙의 목이 날아갔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것은 오삼계 부대가 아니라 팔기군이라 합니다."

정보 참모가 보고했다.

"뭣이라고?"

이자성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도 팔기군의 용맹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삼계는 어디가고 팔기군이란 말인가?"
"그것이 바로 아리송한 의문입니다. 아직까지 그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삼계가 하늘로 치솟았단 말인가? 땅으로 꺼졌다는 말인가? 오삼계의 진상을 파악하라."

정보참모가 즉시 동쪽으로 출발했다.


태그:#산해관, #오삼계, #도르곤, #소현세자, #대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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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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