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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땐 말이야 우리 서랍에서 클립이 제일 멋있는 것 같아.”

오늘도 할일 없는 압정이 서랍 속의 문구들을 평가합니다.

“클립은 말이야, 세금계산서랑 A4용지를 함께 첨부할 때 제일 잘 어울려."

압정이 클립을 칭찬하더니 갑자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핍니다. 

 

“지금 스테이플러 없지? 스테이플러 걔는 왜 그래? 무조건 집고 봐. 또 집으면 격이 많이 떨어져. 우리 문구 가운데서 제일 무식한 놈이야. 그런 놈은 하루빨리 우리 서랍 속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말이야.”

 

압정이 안타깝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쉽니다. 압정은 서랍 속에서 스테이플러를 제일 껄끄러운 상대로 여깁니다. 커다란 몸집의 스테이플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압정에게 위협적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압정은 스테이플러가 있는 곳에서는 한 번도 평가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만만한 볼펜을 비롯해 연필, 지우개, 딱풀, 매직 등 다른 문구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합니다.

 

압정은 스테이플러 앞에서 유독 다른 문구들에 대한 평가를 많이 합니다. 자신이 스테이플러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다는 것을 다른 문구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스테이플러는 그럴 때마다 듣는 둥 마는 둥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스테이플러가 나가면 압정은 기다렸다는 듯 언제나 스테이플러를 험담합니다.

 

오늘도 압정은 스테이플러가 밖으로 나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방합니다. 압정의 험담은 이제 문구들에게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들 서랍 속에 압정만 없다면 평온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압정의 뾰쪽한 침은 다른 문구들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물론 요즘 들어 문구들이 워낙 탄탄하게 나오다보니 압정에게 상처받을 문구들도 별로 없습니다. 서랍 속의 문구들은 딱히 압정이 무섭다기보다 상대하기가 귀찮았습니다. 그런데 압정은 자신의 뛰어난 맵시와 위협적인 몸 때문에 다른 문구들이 반항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압정이 가장 많이 평가하는 문구는 단연 지우개입니다. 지우개는 다른 문구들에 비해 피부가 연약하고 상처를 쉽게 입을 수 있는 연약한 문구입니다. 압정은 툭하면 지우개를 평가합니다. 지우개는 지우는 일보다 압정에 의해 시도 때도 없이 거론되는 평가에 더 힘들어 했습니다.

 

“내가 볼 땐 말이야. 우리 서랍 속에서 지우개가 제일 일을 많이 해. 지우개가 없으면 연필도 힘을 못 쓰잖아. 연필은 항상 지우개한테 고마워해야 돼. 그런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면 연필은 정말 문구도 아니다. 어이 연필! 어떻게 생각 해?”

 

연필이 압정에게 슬쩍 눈을 흘기다가 이내 눈을 떨굽니다. 지우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어느새 둘 다 격무로 인해 많이 수척해지고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매우 피곤해 보입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내 말이 틀렸어?”

“맞아. 나도 지우개한테 항상 고마워 해.”

연필이 애써 겸연쩍게 웃으며 말합니다.

 

“맞아. 그렇지. 우리 연필도 가만히 보면 참 성실해. 자기 몸 상할 거 뻔히 알면서도 꽤 안 부리고 일하는 것 보면 다른 문구들도 본받아야 해! 근데 저기 볼펜 말이야. 쟤는 일할 때 보면 몸을 좀 사리는 것 같아.”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는데?”

볼펜이 화가 난 듯 압정을 째려봅니다.

 

“저 눈 봐라. 내가 너한테 조언을 하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게 가장 객관적이야. 연필은 항상 심이 노출되어 있잖아. 근데 너는 틈만 나면 심을 몸속에 집어넣잖아. 너무 몸 사리는 것 아니니?”

“그건 내 스타일이야. 본능이라고.”

 

“본능, 아무튼 말은 잘해. 그런 고정관념을 깨야 해. 앞으로 연필을 닮도록 해. 그래야 문구들이 욕을 안 얻어먹지. 쯧쯧쯧. 그리고 딱풀, 너는 말 좀 하고 살어! 함께 사는 서랍속이야. 만날 그 뚜껑 눌러쓰고 있지 말고. 우리한테도 말 좀 해라.”

딱풀이 물끄러미 압정을 바라봅니다. 보다 못한 매직이 한소리 합니다.

 

“야! 딱풀이 뚜껑을 열면 몸이 다 굳어 버리는 걸 모르니? 그건 딱풀한데 죽으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아.”

“야! 그래도 서랍 안에서 뚜껑 연다고 금방 죽니? 주인한테는 잘도 뚜껑 벗더구먼. 주인한테 너무 아부하지 말어. 우리보다 주인이 좋다 이거지. 그래 혼자 잘해 봐라”

압정의 말에 화가 난 나머지 그동안 말을 아꼈던 딱풀의 뚜겅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내가 참아 왔는데. 아부라고? 난 지금까지 내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오호! 말 하네. 그래. 앞으로 자주 그렇게 나와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래. 난 버버리인줄 알았잖아. 히히히.”

딱풀이 이야기가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다시 뚜껑을 닫습니다.

 

“몇 달째 할일 없이 놀면서 우리를 평가하며 지내는 게 재미있니?”

한 번도 압정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당하기만 하던 지우개가 압정을 보며 말합니다.

“오호! 너가 웬일이냐? 말을 다하고. 많이 컸어. 재미는 무슨. 난 너희들이 잘못된 문구의 길을 가지 않을까 걱정돼 충고해 주는 거야. 특히 넌 나한테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누구나 결점은 있어. 너도 마찬가지고.”

 

“나 말이야. 난 너희하고 달라. 무결점 그 자체야 완벽해. 사실 주인도 날 아끼니까 지금껏 찾지 않는 거고 너희들 하고 차원이 다르지.”

“네 몸을 봐. 압정이면 압정답게 살아야 하는데 제 역할을 못하니까 네 얼굴이 녹슬려고 하잖아.”

"너 지금 감히 나한테 충고 한 거니? 다른 문구도 아니고 하찮은 너가?”

압정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지우개를 봅니다.

 

“그래. 자기 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우리를 일일이 평가하는 너에 대해 우리 문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어?"

“아마, 모두들 고마워하겠지”

“틀렸어. 넌 완전히 재수 없어. 너무 피곤해서 가만있는 것뿐이야. 왜 자꾸 우릴 평가해? 너한테 칭찬받기도 욕먹기도 싫어. 그냥 내버려 둬.”

가장 나약해 보였던 지우개의 말에 압정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너 너 너! 말 다했어. 약해 보해서 내가 칭찬 좀 해 줬더니 이젠 완전히 기어오르네. 그건 너 생각이겠지. 너처럼 생각하는 문구는 여기 하나도 없어. 안 그래 얘들아?”

서랍 속 문구들이 싸늘하게 압정의 말을 외면합니다. 압정이 지우개 앞으로 바짝 다가갑니다. 지우개가 긴장합니다.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이 많은 문구들 앞에서 나를 아주 밟아 버리는구나.”

압정이 바늘 끝을 세웁니다. 클립과 연필, 볼펜 등 서랍속에 있는 문구들이 동시에 압정을 막아섭니다.

“너희들 뭐야?”

“그만해. 압정아, 우리 이제 평가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자. 네가 무슨 권리로 우리를 평가하고 우린 왜 너한테 평가를 받아야 하니? 그러지 말자.”

클립이 압정에게 손을 건넵니다.

“뭐야? 너 내가 조금 전에 칭찬해 줬잖아. 근데 왜 이러는 거야?”

압정이 클립을 찌를 듯이 아래위로 훑어보지만, 클립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칭찬은 나를 위한 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보여주기 한 거잖아.”

“뭐야? 솔직히 내가 너보다 잘났잖아. 원래 잘난 문구가 평가하는 거야.”

“잘난 문구가 평가를 한다고? 너와 내가 다른 게 뭐가 있니? 우린 다 같은 문구야.”

볼펜이 클립 앞을 막고 압정에게 말합니다. 압정이 분을 못 참겠다는 듯 달려들 기세입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스테이플러가 서랍 속에 들어옵니다. 오늘은 일을 많이 했는지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압정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둘러 제자리로 갑니다. 스테이플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압정을 보고 말합니다.

 

“너, 오늘 이 곳을 나갈 것 같아.”

“뭐라고? 내가 왜 여길 나가?”

“주인이 나무로 된 게시판을 만들더라고.”

압정이 스테이플러의 말에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 주인님이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리가 없어. 난 여기서 너희들을 평가해야 된다고.”

스테이플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잠시 후 주인의 손이 서랍 속에 들어 왔습니다. 압정이 본능적으로 침을 세웁니다. 잔뜩 독이 오른 압정이 서랍을 뒤지던 주인의 손을 찌릅니다. 순간 주인의 손이 서랍 밖으로 황급히 나갑니다.

 

“봤지? 아무도 날 못 건드려. 난 압정이라고. 문구 중에 최고란 말이야. 주인도 꼼짝 못해.”

압정이 눈을 부라리며 문구들을 쏘아 봅니다.

“너희들은 내 평가를 받아야만 제대로 된 문구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이 미련한 것들아!”

보다 못한 스테이플러가 압정을 제압하기 위해 걸어가는 순간 나갔던 주인의 손이 다시 들어오더니 조심스럽게 압정을 듭니다.

 

“이거 뭐야? 젠장 녹까지 슬었네. 쓰지도 못하겠군. 버려야겠어.”

압정은 주인의 손에 이끌린 채 제대로 문구 구실도 못하고 침이 뭉개진 채 버려졌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은연중에 사람에 대한 평가를 습관적으로 하지 않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태그:#성인동화, #문구, #스테이플러, #압정, #딱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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