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7월 31일, 역사적인 하루가 시작되다

엘레나 산장에서 보인 스피크(Speke) 산의 만년설
 엘레나 산장에서 보인 스피크(Speke) 산의 만년설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7월 31일 아침, 드디어 오지탐사대원들에게 있어 역사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보니 시계는 새벽 4시를 훌쩍 넘어 거의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태까지 산행하면서 전 대원이 늦잠을 잔 적은 없었는데, 모두 고소 때문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잠에서 깬 나도 머릿속이 멍해서 기분이 영 상쾌하지 않았다.

대원들의 아침은 수프였다. 고산병에 걸려 입맛이 없을 대원들을 고려한 음식이었다. 일부는 여전히 두통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대장님이 그중 도진 오빠에게 정상에 오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도진 오빠는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대장님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도중에 포기하면 모두 하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수프를 마시면서 '너도, 갈 수 있는 거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그런데 왠지 불안했다. 막상 당일이 되자, 넘치던 전날의 자신감과 용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작도 안 하고 포기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몸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 몸은 알아서 다른 대원들처럼 배낭 짐을 싸고 등반 장비를 몸에 채웠다. 아니, 장비는 등산 경험이 많은 재호 오빠와 가이드가 대신 채워 주었다. 한국에서 훈련할 때 착용 방법을 배웠는데도, 실전에서 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오지탐사 대원들, 마르게리타 봉으로 출발!

해가 뜨기 전, 오지탐사대원들은 엘레나 산장을 떠나 마르게리타(Margherita) 봉(5109m)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상 시간이 많이 늦었기 때문에, 마음은 빨리 마르게리타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급했다.

하지만 대원들은 처음부터 엘레나 산장에서 본 가파른 암벽 구간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축축한 바위는 미끄러웠기 때문에, 모두 속도를 늦춰가며 천천히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암벽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대원들
 가파른 암벽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대원들
ⓒ 박대하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바위가 등산의 유일한 장애물은 아니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두꺼운 방한복과 우모복을 겹쳐 입고, 등산 장비까지 걸치고 나니 몸이 전혀 내 몸 같지 않았다. 몸이 중력을  거슬러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면, 중력은 더욱 강하게 내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바라클라바 속에 감춰진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산소 부족도 여전했다. 호흡은 나도 모르게 자꾸 가빠졌다. 다른 때보다 힘이 더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지쳐버렸다. 마치 더위 먹은 강아지처럼, 나는 수차례 헥헥 거리며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래도 암벽 구간에서 맞이한 일출은 내게 힘을 주었다. 일출을 거의 못 보고 살 정도로 아침잠이 많은 나지만,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상쾌한 일출이었다. 넓게 펼쳐진 구름을 제치고 솟아나온 해는, 카메라에 그 빛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리고 그것은 눈부신 빛으로 마르게리타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우리 앞길을 안내하듯이.

넓게 펼쳐진 구름을 제치고 솟아나온 해는, 카메라에 그 빛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넓게 펼쳐진 구름을 제치고 솟아나온 해는, 카메라에 그 빛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잠깐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얼마 뒤 만년설 구간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대원들은 준비한 아이젠을 착용했다. 그리고 3조로 나눠 조원들끼리 안자일렌을 했다. 나는 가이드 조엘 뒤에 섰고, 내 뒤로 4명의 남자 대원들이 차례대로 섰다. 어떤 일이 생겨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아주 든든했다.

한 줄에 묶인 대원들은 차례대로 만년설을 밟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조는 두 번째로 출발했다. 암벽 구간을 지난 뒤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왠지 만년설 구간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데다, 만년설 구간의 경사가 완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5109m 마르게리타 봉(오른편 봉우리)의 전경
 5109m 마르게리타 봉(오른편 봉우리)의 전경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만년설 구간은 가파른데다 한없이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발이 눈 속에 빠질 때마다 그대로 눈 위에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한 길을 걷고 있는 대원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눈 위로 나 있던 발자국은 지친 나를 격려해 주었다. 하얀 만년설에는 그간 마르게리타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나도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는 마음으로 발자국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었다. 간혹 쉴 때는 눈에 알파인 스틱으로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나중에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만년설 구간에 선 대원들. 마르게리타 봉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구간을 거쳐야 한다.
 만년설 구간에 선 대원들. 마르게리타 봉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구간을 거쳐야 한다.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5109m 마르게리타 봉 정상에 오르다 

만년설 구간을 지나고 난 뒤 정상 부근에서는 암벽 구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암벽 구간은 그 어느 곳보다 위험했다. 대원들은 확보 줄을 매고 한 명씩 암벽을 지나갔다. 암벽 아래 가파른 절벽에는 모가 제멋대로 난 바위들이 있었다. 섬뜩했다.

하지만 암벽 구간을 무사히 통과한 대원들은, 산행 4시간 뒤 마침내 마르게리타 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는 이미 도착한 1조 대장님과 소윤이, 그리고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이 대원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정상에 오르자마자 표지판 앞에 섰다. 인생에 있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킬리만자로, 케냐 산과 더불어 아프리카 3대 만년설산으로, 그 중에서 가장 오르기 힘들다는 르웬조리, 그리고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스피크(Speke) 산의 마르게리타 봉에 내가 서 있었다. 

마르게리타 봉 정상에 오른 대원들
 마르게리타 봉 정상에 오른 대원들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안타깝게도 날씨는 대원들 편이 아니었다. 안개가 짙게 껴서 정상 아래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념비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 뒤, 암벽 구간을 지나고 만년설을 지날 때에도 기대했던 파란 하늘과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린 하늘에 우박 같은 눈이 내릴 뿐이었다. 아쉬웠지만, 이곳은 '비의 언덕' 르웬조리였다.

소윤이 발목 부상에 악화된 날씨... 등정보다 힘들었던 하산길

하산 길은 올라갈 때보다 좀 더 쉬우려니 했지만, 마르게리타는 마지막까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상의 암벽 구간에서는 소윤이가 하강 도중 가이드의 실수로 발목을 다쳤다. 그리고 엘레나 산장으로 내려가는 암벽 구간에는 비가 내렸다. 오를 때도 경사 때문에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는데, 내려갈 때는 암벽에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산 중인 대원들. 날씨가 좋지 않아 하늘이 뿌옇다.
 하산 중인 대원들. 날씨가 좋지 않아 하늘이 뿌옇다.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그러자 대장님은 우리에게 암벽 하강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당일 계획에 따르면 엘레나 산장에서 400m 아래에 있는 키탄다라(Kitandara) 산장(4050m)에 가야 했다. 그런데 정상 등반이 예상 시간보다 늦어진데다, 날씨가 좋지 않아 팀의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 침착하게 줄을 잡고 암벽을 내려갔다. 그리고 소윤이와 고소에 시달리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엘레나 산장으로 돌아갔다. 하산 도중 암벽 위를 바라보니, 빗속에서 암벽 하강 중인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내려오지 않은 다른 대원들이 무사히 엘레나 산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암벽 하강 준비를 서두르는 가이드와 유한규 대장님
 암벽 하강 준비를 서두르는 가이드와 유한규 대장님
ⓒ 박대하

관련사진보기


늦은 시간, 고산병에 시달리는 대원들...'그래도 하산!'

다행히도 얼마 뒤 모두가 산장에 모였다. 그러나 이미 산행할 시간이 꽤 늦어졌고, 대원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당연히 대장님이 계획을 취소하고 엘레나 산장에서 하루 더 머물자고 말씀하실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장님은 모두가 늦은 점심을 먹은 뒤 키탄다라 산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고산병에 시달리는 대원들에게는 하산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미 포터들이 정상 공격에 불필요한 짐을 키탄다라 산장으로 들고 가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 일을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틀 치의 산행을, 그것도 몇몇 대원들이 고산병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상황에서 하루 만에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설상가상으로 헤드랜턴을 잃어버렸는데, 밤길에 헤드랜턴 없이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을지 불안했다.

어쨌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키탄다라 산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조엘, 도진 오빠, 진철 오빠와 한 팀이 되었다. 하산 길은 역시나 험했다. 올라올 때와 다른 길이었는데 지름길이었는지 훨씬 더 위험했다. 하지만 나는 미끄러운 암벽과 진흙보다 밤이 더 두려웠다. 헤드랜턴이 없는 밤에는 그야말로 눈뜬 장님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어둑어둑한 길

하지만 기어코 밤은 찾아오고 말았다. 산장은 도저히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엘은 언제 산장에 도착할지 묻는 대원들의 질문을 거절했다.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어둑어둑한 길에서, 나는 조엘의 안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엘은 랜턴을 앞뒤로 돌려가며 내 앞길을 밝혀 주었다. 길에는 나무뿌리와 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걸려 넘어질 수 있었다. 나는 잘 보이지 않는데다 발 딛는 곳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하산하는 동안 투덜거리기도 했다.  

짜증이 난 것은 조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헤드랜턴 잃어버린 것이 자신의 실수도 아니었는데 오죽했을까. 그런데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렇게 키탄다라 산장까지 나를 인도해 주었다. 처음에는 도착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조엘이 원망스러웠지만, 산장에 도착하니 그렇게 미안하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키탄다라(Kitandara) 산장(4023m)
 키탄다라(Kitandara) 산장(4023m)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화장실 찾다가 별천지 발견한 사건

우리 조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9시였다. 늦게 출발한 대원들은 그 뒤 1시간 간격으로 산장에 도착했다. 거의 자정에 도착한 대원들도 있었다.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었다.

나도 확신했다. 오늘이 르웬조리에서 보낸 가장 힘든 하루였다고. 나 또한 완전히 지쳐있었다. 하지만 힘들어도 화장실에는 가야만 했다. 그런데 내게는 헤드랜턴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화정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산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한밤중에 도착한 곳이었기 때문에 화장실이 어딨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산장 근처에서 실례(?)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던 도중, 언니와 나는 한적한 호숫가를 발견했다. 키탄다라(Kitandara) 호수였다. 산장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아주 좋은 장소였다.

다음 날 아침에 본 키탄다라(Kitandara) 호수
 다음 날 아침에 본 키탄다라(Kitandara) 호수
ⓒ 이지수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호수는, 알고보니 그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다. 까만 밤하늘에는 남반구의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호수에는 그 빛이 반사되어 마치 별들이 호수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나는 그 자리에서 실례를 하는 것이 황송할 정도였다.

그래서 화정 언니와 나는, 그곳이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다른 대원들을 불러왔다. 호수를 본 대원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별을 머금은 호수는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나도 덩달아 호수에 빠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원들은 키탄다라 호수를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모두 풀어버렸다. 나는 혹시나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별똥별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내멋대로 소원을 빌었다.

정상 등반은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하산까지 마쳐야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별들과 르웬조리에게 빌었다. 모두가 마지막까지 무사하게 하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르웬조리, 앞으로도 오지탐사대원들 잘 좀 부탁할게요.'


태그:#오지탐사대, #아프리카, #만년설, #르웬조리, #마르게리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