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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니던 사무실의 작업환경은 꽤나 열악했다. 사무실도 좁았지만, 글쟁이에게 너른 사무실이 무슨 소용이던가. 글을 쓸 수 있는 컴퓨터와 자기 책상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사무실 크기가 아니었다. 혼잣말의 대가인 옆옆 자리에 앉은 직원이 주범이었다. 혼잣말이 무슨 대수냐고? 맞다. 나도 혼잣말이라면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내뱉는 인종이다. 심지어 그 사람 많은 코엑스나 종로2가 한복판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혼잣말을 크게 내질러 사람들이 정신나간 사람 쳐다보듯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정도니까, 말 다했다.

 

그런데 그 혼잣말이 좁다란 사무실에서 울려퍼질 때는 말이 달라진다. 게다가 그 혼잣말은 진짜 혼잣말이 아닌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상대 회사 직원에 대한 욕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과다한 업무량 때문인지 그이의 성격 탓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담겨진, 저주에 가까운 혼잣말이 그 비좁은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인 직원들 전체의 기분을 망친다는 점이었다. 왠지 괜히 내가 욕먹은 듯 한 느낌, 도대체 그녀의 히스테리는 어디서 연유하는가에 대한 2%의 궁금증, 저 인간과는 정말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98%의 유감.

 

현실감각 투철한 영애씨,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막돼먹은 누구누구씨'는 저렇게 은근하게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족속들 아닐까?

 

그리하여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막돼먹은 영애씨(tvN, 매주 금요일 밤 11시)>의 영애씨는 '절대 막돼먹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무게감 있는 외모에 자기 주장이 조금 강할 뿐이다. 일 잘 하지, 집에서는 든든한 장녀지, 어딜 봐서 그녀가 막돼먹었다는 건가.

 

먼저 우리 영애씨만의 특징을 짚어 보자.

 

우선 두툼한 살집. 사실 영애씨가 30대 초반 대한민국 여성들의 평균 체중을 상회하는 건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옆자리의 철없는 이혼녀 지원이 평균 이상의 날씬한 몸매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대머리 사장에게 '덩어리'라고 놀림을 받긴 하지만 영애씨의 최대 무기는 어찌됐건 '건강'이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현실감각은 영애씨의 최대 장점이다. 드라마에 차고 넘치는 공주병도 아니고, 이제는 신화화된 캔디형 주인공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영애씨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어이없는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정의파(?)에 가깝다. 회사에서는 적당히 사장에게 대들다가도, 녹차에다 걸레를 짜서 넣을 줄 아는 센스쟁이 대리이기도 하다.

 

그렇다. 영애씨에게 '현실'이란 두 글자를 빼 버리면 시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가끔 부모님도 몰라볼 만큼의 주사는 애교로 봐주자. 술 마시면 다 취하기 마련이다. 정작 소주 대여섯 병을 비워도 멀쩡하고, 다음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심지어 화장까지 멀쩡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다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심각한 수준이다.

 

술 취한 채로 공중전화박스에서 실례를 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느냐고? 맞다. 심하다. 하지만 기억이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날아간 상태에서 영애씨의 주사는 다 우리의 실수를 반영하는 거울인 만큼 너그러이 보듬어 줄 줄 아는 아량을 베풀어 보자.

 

극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그녀의 매력

 

그리고 그녀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미! 인간미가 있다. 그러니까 영애씨는 슬플 때는 울고, 화날 때는 욕하고, 즐거울 때는 술 한 잔 할 줄 아는 우리 곁에 있는 진짜 '사람'이다.

 

연하에다 꽃미남 도련님을 좋아하다가도 높은 현실의 벽(?) 앞에 주저하고, 우여곡절 끝에 애인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자신의 뱃살을 걱정하는 우리 영애씨. 새로 부임한 과장이 같은 과 선배라는데, 친한 척 한 번 안해주는 그에게 바로 눈 한번 흘겨주는 솔직함이 미워할 수 없는 그의 매력이다.

 

"인생은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내 앞에 놓인 산을 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니까요."

 

시즌3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어쨌거나 저쨌거나 영애씨는 여느 산악가 못지않게 열심히 산을 타는 것 마냥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열심히 다이어트도 하고, 열심히 연애도 하며, 열심히 회사도 다닌다. 어떤 때는 내 모습 같고, 어떤 때는 바로 옆 동료 같으며, 어떤 때는 사실 '막돼먹은' 내 예전 회사 직원 같기도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영애씨, <막돼먹은 영애씨>의 매력이다. 과장되지 않은 '다큐' 드라마의 진솔함, 지나치게 극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담백함 말이다. 국내 최초로 4시즌을 시작한 저력은 다 거기서 비롯된다. 

 

세상을 막 다루는 영애씨, 멋지다!

 

여기서 하나, 시즌3을 거치면서 영애씨가 너무 '돼먹은' 캐릭터로 변했다는 말들이 많았었다. 도련님과의 로맨스에 정신이 팔려 특유의 막돼먹은 세상과의 대거리를 등한시하는 거 아니냐는 질책도 심심치 않았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세친구> <연인들>의 임수미 작가가 새로 투입되면서 시즌4는 초심으로 돌아가 세상을 좀 더 막 다루는 영애씨의 일상에 카메라를 좀 더 들이댈 예정이란다. 5일 방송된 4시즌은 그러한 제작진의 의도를 반영하는 듯 로맨스와 등장 인물들의 일상이 잘 버무려졌다. 그래, 산소 같은 영애씨가 아닌 이상 순해진 영애씨는 우리의 관심 대상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영애씨, 좀 더 세상을 막 다뤄주세요. 좀 더 막돼먹은 일탈과 반항을 일삼아 주세요.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당신의 막돼먹음을 좀 더 세상에 널리 퍼트려 주세요.

 


태그:#막돼먹은영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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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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