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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황후가 거처했던 침전. 장비는 여기에서 홍승주를 맞이했다. 심양고궁에 있다.
▲ 영복궁. 효장황후가 거처했던 침전. 장비는 여기에서 홍승주를 맞이했다.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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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가 홍승주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홍타이지의 허락을 받았지만 구중궁궐 중궁전의 안주인이 적장을 침전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정에 발을 들여놓은 홍승주는 깜짝 놀랐다.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한 해자(垓子)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저기 도랑을 파놓고 침입자의 은신처를 없애기 위하여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었던 자금성과는 사뭇 달랐다. 웅비하는 청나라의 자신감이라 여겨졌다.

청나라의 힘, 검소한 생활과 자신감이었다

호송하는 군사를 따라 영복궁에 도착했다. 북경의 호화로운 황궁을 드나들던 홍승주는 그녀의 검소한 침전에 또 한 번 놀랐다. 자금성의 교태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협소하고 초라했다. 이것이 바로 청나라가 일어서는 힘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손님을 모시면서 이렇게 무례하게 모셔오는 경우가 있느냐? 당장 포승을 풀어드려라."

홍승주의 손이 묶인 것을 발견한 장비가 호송한 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머쓱해진 군사들이 결박된 홍승주의 손을 풀어주고 문밖으로 물러갔다. 썰렁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장비가 인삼탕을 내놓았다.

"결례를 이해하십시오. 전쟁터를 누비던 병사들이라 예의가 소홀합니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는 예의가 거추장스러울 수가 있겠지요."

"조선의 영약 인삼탕입니다. 어서 드세요."
"한족은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몸, 오래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홍승주는 자신의 입신출세를 주씨 황가의 크나큰 은혜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흐르는 계곡물을 마실 때, 상류의 일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마셔야 살 수 있으니까요. 조선 인삼이 몸에 좋다하니 드시고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만주 벌판의 불곰을 조련하는 조련사

거듭 권했지만 홍승주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물러설 장비가 아니다. 숟가락을 들고 인삼탕을 떴다. 그리고 홍승주의 입으로 디밀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청나라가 제공하는 음식을 넘기는 것조차 수치로 생각하고 있던 홍승주가 당황했다. 그것을 노린 것이 장비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홍승주가 장비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눈빛은 거역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눈빛은 바다를 가르고 산을 무너뜨릴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적장의 입에 인삼탕을 떠 넣어준 여인. 무서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홍타이지가 만주벌판의 불곰이라면 장비는 그 불곰을 조련하는 조련사 같아 보였다.

제집 드나들듯 하던 자금성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황공한 대우다. 순간 홍승주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한 황후를 모시는 조정이라면 남은 여생 신명을 바쳐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홍승주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후일임오는 문제없을 것입니다."

장비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일임오(後一壬午)라면 금년이 임오년이니 앞으로 60년. 105세까지 살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칼날을 받아야 할 목이 인삼탕을 넘기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이 목을 세워 다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장비에게 하직인사를 하던 홍승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홍승주는 큰 바위였다. 여진족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에게 음식물을 떠 넣어주는 풍속이 있었다. 유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과공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문화의 차이를 활용하려던 장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단단히 벼른 범문정이 감옥으로 홍승주를 찾아갔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감옥 별실. 마주 않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누가 설득당하고 누가 설복 당하느냐의 불꽃 튀는 기 싸움이다.

홍승주는 절대 자결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이 습한 공간을 메웠다. 그 때였다. 서까래 썩은 작은 부스러기가 홍승주의 옷에 내려앉았다. 범문정을 노려보던 홍승주가 시선을 거두고 먼지를 털어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문정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를 알현한 범문정이 보고했다.

"홍승주는 절대 자결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장담하나?"

"소신과 마주앉았을 때 옷에 떨어지는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몸에 걸친 옷도 그토록 아끼는데 자신의 목숨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반가운 소리구만, 내일 태묘에 갈 때 홍승주를 데리고 갈 것이다."

홍타이지는 전장에 나갈 때면 성황당에 제를 지내고 아버지 누르하치 묘를 참배하고 전쟁터로 떠났다. 이튿날, 태묘에 도착한 홍타이지가 누루하치 묘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는데 홍승주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배를 마친 홍타이지가 홍승주에게 다가갔다.

"불편한 것은 없소."
"무릎을 꺾을 수 없어 그것이 불편 하외이다."

뼈있는 답변이다.

"이곳의 바람이 차구려. 땅의 온기를 느낀 사람이야 추운 줄 모르겠지만 서 있는 사람은 더 추울 것이오."

체온을 유지하려면 땅의 온기를 가까이 하라

장군 멍군이다. 뼈있는 홍승주의 말에 칼처럼 예리한 홍타이지의 대꾸다. 따뜻함을 느끼려면 무릎을 꺾으라는 것이다. 옷을 얇게 입고 있는 홍승주를 발견한 홍타이지가 입고 있던 담비가죽옷을 벗어 손수 입혀주었다. 갑작스러운 홍타이지의 돌출행동에 놀란 홍승주가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진명천자이구나."

홍승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홍타이지가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홍타이지의 손에 이끌리어 일어서는 홍승주의 몸이 무거웠다. 장비의 회유에 절의가 꺾였다면 가벼울 수 있다. 범문정의 설득에 무너졌다면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 상 범문정의 휘하가 된다. 최종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최고 권력자에게 무릎을 꺾었을 때 자신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것을 홍승주는 알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홍타이지가 범문정을 불렀다.

"이제 중원으로 들어갈 길 안내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감축 드리옵니다."

"이제부터 홍상을 잘 모시도록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동반자가 생겼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타의에 의해 조성된 환경이다. 이제부터는 경쟁체제다. '동반자를 뒤따라가면 2등이지만 동반자를 끌고 가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범문정이 홍승주를 찾아갔다.

"이제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콩 한조각도 나누어 먹도록 합시다."
"먹는 것은 차후에 하고 우선 전해줄 말이 있으니 좌우를 물리쳐 주시오."

부하들을 물리쳐 달라는 것이다. 범문정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물러났다. 같은 한족이니 통역도 필요 없는 독대다.

"조선 영상이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조선의 영의정이 밀서를 보내왔다고요?"

범문정은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했다.

"최상이 보내온 서찰입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홍승주가 품속에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그 서찰은 최명길의 친필이 분명했다. 최명길에게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청나라에 투항한 홍승주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명나라가 하루 빨리 망하기를 바랐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명나라가 기사회생한다는 것은 홍승주에게 재앙이다. 그렇게 되면 청나라와 명나라에서 버림받게 되는 자신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조선 수군이 배후를 공격하면 난감하다

홍승주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조선이었다. 명나라 군이 '팔기군 괴담'에 떨고 있었다면 홍승주는 조선 '수군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불과 45년 전, 12척의 전선으로 333척의 일본 병선을 섬멸했던 조선 수군이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범문정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을 정벌한 청나라군은 조선 수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남한산성 함락 이후 조선 팔도를 샅샅이 뒤졌다. 조선 수군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소형 병선 몇 척 뿐이었다.

"임진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다. 명나라의 참전과 조선 수군의 분전으로 일본군이 퇴각했다. 명나라가 쇠잔해진 지금, 일본이 우월적 지위에서 조선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일본 연안에 조선 수군을 빼돌려 둘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범문정은 소현을 황궁으로 불러 '천황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가강(家康)은 누구이고 평수길(平秀吉)은 누구냐?' '천황의 아들은 왜 중이 되느냐?' 일본이 명나라에 보낸 문서에 '옹용수공(雍容垂拱)이란 말이 들어 있는데 무슨 뜻이냐?' 등등 뭔가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추궁한 적이 있었다.

조선과 일본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은 것은 청나라와 명나라가 일치했다. 즉, 대륙에 기반 한 세력은 해양세를 경계했던 것이다.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순신의 후예들이 명나라와 연합하여 청나라의 배후를 친다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러한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조선을 더 묶어 두어야한다. 그 대상을 최명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범문정의 보고를 받은 홍타이지는 분노했다. 조선 조정에서 김상헌은 응징의 대상이었지만 최명길은 쓰다듬어주고 싶은 대신이었다. 그런데 그 최명길이 명나라 조정과 밀통했다니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최명길을 당장 잡아 오도록 하라."

홍승주의 항복이 최명길에게 악재가 된 것이다.


태그:#소현세자, #홍타이지, #홍승주, #범문정,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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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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