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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양화당 편액
▲ 양화당. 창경궁 양화당 편액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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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계를 받은 조정은 경악했다. 사신이라면 일정을 사전 통보하고 접반사의 영접을 받으며 도성에 들어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국경에서 조정대신들을 부르니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더구나 군사를 이끌고 왔다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인조는 대소신료들을 양화당으로 불렀다.

"칙사라면 영접을 받으며 도성에 들어와야 하거늘 국경에서 대신들을 부르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용장이 중강에 도착하여 부르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들이 이현영과 신득연, 박황, 그리고 신을 부른 것은 횡의(橫議)를 낸 사람을 찾아 엄하게 다스리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더구나 군사를 이끌고 왔다 하니 우리를 협박하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의정 홍서봉이 청나라의 의중을 꿰뚫는 전망을 내놓았다. 청나라의 징병에 반대한 사람을 색출하겠다는 저의라는 것이다.

"경의 예측이 맞는 것 같다."

예측이 틀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군대를 끌고 온 정황으로 보아 심상치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아서 기는 심정으로 반청론자들을 내주어야 하는가? 맞서야 하는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반청론자를 내놓으라 하면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국경에 나가 용장을 만났을 때 횡의를 주장한 사람의 이름을 대며 힐문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저들은 필시 조정으로 하여금 적발하라고 할 것이므로 먼저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부터 나는 이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상소 중에서 청국에 관계되는 것은 정원에서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승정원이 올리고 내리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되어 이것이 항상 근심이었다."

인조가 맥을 제대로 짚었다. 승정원과 임금 사이에는 청나라가 심어놓은 세작이 암약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고급정보를 청나라에 넘겨주어 공을 세우려는 무리들이 박혀있었다.

"일이 매우 중대하니 충분히 의논해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으나 국가 원로로서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승평부원군 김류가 신중론을 폈다. 허나, 시간이 없다. 기일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부르는 날짜에 맞추어 가지 않으면 어떠한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저들에게 '나이 어린 사람이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기한 경우가 있었으나 조정에서 하나도 수용하지 않았다'하면 어떻겠습니까?"

홍서봉이 궁여지책을 내놓았다.

"그러면 저들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데 내놓지 않는다고 여겨 더욱 진노할 것이다."
"신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안에 따라 계품하여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겠습니다."

"경은 어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가? 조정에 품명하는 것은 번신(藩臣)이나 하는 일이다. 어찌 시임 대신이 할 말인가? 이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일이다. 나라를 위해 죽을지언정 두 가지 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목숨 걸고 청나라 군대의 도강을 막아라

인조가 버럭 화를 내었다. 보신에 급급한 영상을 질타한 것이다. 영의정은 일인지하만인지상이다.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지방 수령들이나 하는 처신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책이다. 용골대를 만나면 소신을 가지고 일관되게 밀어붙이라는 것이다.

"저들이 우리의 답변에 만족하지 않고 조정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경은 강을 건너도록 놔두고 뒤따라오려는가?"

인조의 목소리가 커졌다. 목숨을 걸고 청나라 군대가 도강을 못하도록 막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용골대를 만나라는 것이다.

"저들이 강을 건너면 힘없는 신으로서야 전혀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소신은 근력을 다할 뿐입니다."
"군대를 근력으로 막으려는 계책은 아둔한 사람들이나 쓰는 방책이다. 지혜로 막아야 한다. 지혜..."

인조는 지혜라는 낱말이 이렇게 목마름으로 다가올 줄은 예전엔 몰랐다.

"지혜를 짜내어도 나오지 않는 지혜를 어디서 구한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인걸은 어디가고 소인배들만 있단 말인가

인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걸은 어디 가고 소인배들만 있단 말인가. 나라가 또 다시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힐 위기에 처해 있는데 목숨 걸고 타개하겠다는 신하는 없고 보신에 급급한 신하들만 있으니 한탄스러웠다.

"용장은 신과 산성에서부터 구면이니 말이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면 비록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홍서봉이 강화조약 협상을 상기하며 기대치를 높였다. 허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 보장이 없다.

"저들이 어찌 경을 죽이겠는가?"
"비록 죽이지는 않을지라도 소신을 묶어 심양으로 압송하지 않으리란 것 또한 없지를 않습니까?"

"저들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조정에서 비책을 내놓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이 죽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대사헌 김영조가 쾌한 해법을 내놓았다. 명답이다. 임금 인조가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총대를 메라는 것이다. 인조 역시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병자년에 산성에서 죽었더라면 어찌 이런 꼴을 보겠는가. 종사와 생령을 위해 치욕을 참고 성에서 나와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하였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인조가 탄식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대소신료들도 한숨을 내쉴 뿐 말이 없었다. 양화당이 숙연해졌다. 왕의 슬픔은 곧 대신들의 아픔이며 국가의 비극이다. 그러나 뾰쪽한 대책이 없다. 그것이 문제였다. 장마가 갠 창경궁에 또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분리 수용하여 개별 심문하겠다는 청나라

영의정 홍서봉. 이조판서 이현영. 도승지 신득연이 원접사 윤휘, 승지 이덕수, 감사 정태화, 병사 이현달, 빈객 이행원, 보덕 정치화와 함께 의주에 도착했다.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관에 자리를 잡은 용골대가 호통을 쳤다.

"왜 박황은 오지 않았는가?"
"박황은 순검사의 직임을 받아 삼남에 내려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밀지를 내렸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다."

홍서봉이 박황의 불참 사유를 설명했다.

"알겠다. 냉큼 오라는 내 명을 다시 전하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즉석에서 홍서봉이 역마를 띄웠다. 부릅뜬 눈으로 좌우를 흩어보던 용골대가 부하에게 명했다.

"이봐라. 판서와 도승지를 각각 별도로 모셔라."

군사들이 달라붙어 이조판서 이현영과 도승지 신득연을 죄인 다루듯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분리 수용이다. 서로 말을 맞추지 못하게 하고 개별 심문하겠다는 뜻이다.


태그:#인조, #용골대, #홍서봉, #의주,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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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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