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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찰칵, 자, 영수씨 이쪽 한 번 봐 줘요. 그렇지! 좋아요, 네. 여기까지 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곳은 잡지 촬영이 한창인 강남의 스튜디오. 이제 갓 모델 일을 시작한 영수씨가 첫 촬영을 마쳤다. 꿈 많고 순수한 20살의 풋풋함을 마음껏 뽐내는 이 모델, 바로 우리 엄마다.

 

지금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늘어난 뱃살을 자랑하고 계시지만, 한때 우리 엄마는 잘 나갈 '뻔'했던 모델이었단다. 믿기진 않지만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엄마의 20대를 인터뷰했다.

 

"모델 일 해볼 생각 없어요?"

 

 모델 시절의 엄마
모델 시절의 엄마 ⓒ 고유선

스무살이 되던 해, 엄마와 친구들은 봄을 맞아 젊음의 거리 명동으로 쇼핑을 나섰다.

 

한창 예쁜 물건들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없이 구경을 하는 와중에 누군가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모델 일 해볼 생각 없어요?"

 

이 말 한 마디가 우리 엄마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

 

오디션을 보고 모델일을 시작하게 된 우리 엄마 김영수씨.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한두 번의 촬영 후에 엄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여러 동작을 연출하며 촬영을 마쳤다.

 

촬영이 있고 난 얼마 후, 잡지 촬영도 신기한 이 새내기 모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한 음료회사의 광고모델로 설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어릴 적 불렀던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TV에 나오다

 

기쁨도 잠시였다. 막상 현장에 나가보니 메인 모델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엄마는 "괜히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그냥 집에 가버릴까라는 생각도 했다니까"라며 그 때의 속상하고 아쉬운 심정을 회고했다. 하지만 "촬영장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고 했다.

 

마침내 TV에 광고가 나왔다. 동시에 엄마가 살던 동네에도 난리가 났다. 비록 엑스트라였지만 TV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신기해 보였던 것이다. 다들 감탄을 하면서 "저것 보라고! 아이고! 우리 옆 집 영수가 TV에 나왔네"라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이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힌 이도 있었다. 바로 우리 외할머니다. 혼자 된 몸으로 우리 엄마와 이모를 키우신 우리 할머니. 엄마가 잡지 촬영을 하고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는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잊으실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웠지, 우리 영수를 자랑하는 맛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을 때니까."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냥 웃었다는 우리 할머니. 하지만 이 얘기를 듣는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일터로 나가셨던 우리 할머니의 굽은 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광고 촬영 이후로 엄마에게 틈틈이 패션쇼 모델로 설 기회가 주어졌다. 모델의 로망이라는 패션쇼. 그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을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진짜 짱이었지"라고. 패션쇼장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심장을 울리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탄성 어린 눈빛들. 이 모든 것이 스무살 엄마에게는 너무나도 황홀했던 것이다.

 

엄마에게 닥친 불행

 

 할머니
할머니 ⓒ 고유선

하지만, 이런 엄마의 행복을 하늘이 시기라도 한 건지, 엄마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것이다.

 

모델 일을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 모처럼만의 휴식으로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간 우리 엄마. 오랜만의 자유시간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하지만, 콧노래도 잠시였다. 뒤에서 달려온 승용차에 치여 우리 엄마는 10여m 남짓을 날아가 떨어졌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밤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깨어나 보니 병원, 외할머니와 동생이 침대 옆에 붙어 울고 있었다.

 

사고가 난 후, 처음 거울을 보고 난 우리 엄마는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 때의 사고로 얼굴 전체가 크게 훼손됐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 때의 심정을 우리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라."

 

이제 막 피어날 스무살 청춘에 그것도 모델 일을 하는 아가씨가 얼굴이 망가졌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턱뼈를 맞추고, 입술을 복원하고, 잇몸까지 쓸린 치아들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에서 우리 엄마가 흘린 고통의 눈물은 그 양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 사고로 우리 엄마는 모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 엄마는 한때 '잘 나갔던'이 아닌 '잘 나갈 뻔'했던 모델이 된 것이다.

 

퇴원하고 난 뒤, 엄마는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예전 모습이 남아있는 사진들을 모두 찢어 버렸다. 이 사진들이 찢김과 동시에 이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가슴도 찢어졌으리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불행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변해

 

 엄마와 나
엄마와 나 ⓒ 고유선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는 자신의 상황을 차차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회복이 빨라졌다. 엄마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만큼 마음의 상처도 점차 나아갔다.

 

그 이후로 엄마는 강해졌다. 엄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패션모델로서의 감각을 살려 옷가게를 열었고, 열과 성을 다해 가게를 꾸려나갔다.

 

다행히 가게는 무척 잘됐다. 너무 바빠서 식사를 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다시 일어섰다.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엄마는 옷가게를 그만두셨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아줌마를 대표하는 두툼한 뱃살을 자랑하시며 우리 삼남매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고 계신다.

 

엄마는 말씀하신다.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너희를 만날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사고가 난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아."

 

큰 고비를 씩씩하게 넘기신 우리 엄마, 오늘따라 참 든든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엄마! 나는 엄마가 모델이 아니라 우리 엄마라 좋아. 뚱뚱해도 좋고, 촌스러워도 좋으니 오래오래 우리 행복하게 같이 살자. 엄마 사랑해!"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


#모델#영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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