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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고궁. 청나라 건국초기 황궁이다
▲ 심양고궁. 청나라 건국초기 황궁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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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면 배울 것이지 왜 이리 말이 많소?

조선에서 끌려온 세자는 심양에 있다. 조선의 영의정이 심양에 왔으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전후 처리에 대한 막중한 임무를 띠고 심양을 찾은 최명길은 세자 저하를 알현하지 못하는 것이 불충스러웠으나 청나라의 차단을 걷어낼 도리가 없었다. 소현세자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신하의 뒷모습마저도 바라볼 수 없는 참담함이 가슴을 때렸다. 세자관으로 정명수가 찾아왔다.

"세자와 관원들은 몽서(蒙書)를 배우도록 하시오."

"갑자기 배워 익힐 수 없으니 연소한 종관들에게 먼저 배우게 하고 차차 익히겠소."

청나라는 1599년 한자를 모방한 여진문자를 버리고 몽골문자로 만주어를 표기하는 만주문자를 만들었다. 청나라는 이를 개량하여 1632년 유위점 만주문자를 완성하였고 이후 만주문자는 청나라의 공식 문자가 되었다.

"배우라면 배울 것이지 세자는 왜 이리 말이 많소?"

"만주 문자가 어려워서 그러하오."

"황제의 명이오. 이제부터 아문에 보내는 문서는 몽서로 하시오. 알겠소?"

정명수가 다그치며 눈알을 부라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가함대신 박이웅 이하 모든 관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정명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비록 볼모로 잡혀와 있지만 세자 저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억장이 무너졌다.

조선의 공적, "정명수를 처치하자"

"저런 쳐 죽일 놈이 있나?"

"으이구 저런 놈은 당장 요절을 내야 하는데…."

정명수가 돌아간 세자관 마당에서 아전 강효원과 심천로가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심천로는 포로로 붙잡혀 온 사족이었으나 석방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자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다.

"저놈이 전하께서 황제에게 올린 감과 배를 축냈다며?"

"헌상품을 봉송하는데 저놈이 봉황성에 나타나 배와 감 1천개씩을 도적질 했데."

"그 뿐이 아니라 설에 쓰라고 전하께서 보내신 진하품을 의주에서 빼돌렸다가 모르게 들여와 심양에서 팔아먹었데."

"청나라 아문에서 이 사실을 알면 저놈은 이건데."

강효원이 손으로 목이 잘리는 시늉을 하고 있을 때, 청나라 형부(刑部) 관원이 군사 5~6명을 이끌고 들이 닥쳤다.

세자관에 들이닥친 청나라 형부 관원

"조선이 은 2600냥과 잡물 7바리를 정명수와 김돌시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사실을 엄밀히 조사하라는 황제의 명이 계셨다. 지금 너희들이 한 말이 사실이렸다."

강효원과 심천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사실이냐고 묻지를 않느냐?"

두 사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정명수는 밉지만 뇌물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관원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강효원을 조사할 것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세자관 관원을 아무런 통보 없이 연행할 수 있는 것이 세자관의 위상이다. 강효원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하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사서 정뇌경은 아연실색했다.

"강효원이 스스로 감당할 것이다."

애써 위로해 보았지만 불안했다. 잠시 후에 나타난 형부 관원이 정뇌경과 김종일을 연행했다.

"황제의 봉물을 정명수와 김돌시가 빼돌렸다는 사실을 너희들에게 들었다는데 사실이냐?"
그 자리에는 매를 맞고 축 늘어진 강효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렇소. 모두 내가 한 말이오. 여기에 와있는 김종일과 강효원은 아무런 혐의가 없소. 청나라는 도적질한 역관을 엄중 문책해야 할 것이오."

기회는 이때다, "조국을 배반한 매국노를 처단하라"

정뇌경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이왕 터진 뇌물사건. 매국노 정명수를 처단하는 지렛대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청나라 형부에서는 무슨 속셈인지 세 사람을 순순히 돌려보냈다. 내관 나업으로 부터 보고를 받은 세자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저들의 압박이 거세어 질 텐데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이틀 후. 형부의 관원이 정명수와 김돌시 두 역관을 데리고 세자관을 방문하여 정뇌경을 찾았다.

"너의 말이 사실이냐?"
대질신문이다.

"그렇소."

"네가 정명수와 김돌시에게 물건을 건네주었느냐?"

"내가 직접 준 것이 아니라 전하의 진하품을 봉송하던 필선 민응협에게 들었소."
정뇌경은 당당했고 정명수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민응협은 어디 있느냐?"

"본국으로 돌아갔소."

"네가 직접 보지 아니하였고 또 증명할 만한 문서도 없으며 전해준 사람도 나갔다고 말하니 이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먹이를 발견한 살쾡이처럼 노려보는 정명수

굳어있던 정명수의 얼굴이 펴졌다. 형부 관원의 뒤를 따라 나가는 정명수가 정뇌경을 노려봤다. 그 의 눈빛은 먹이를 발견한 살쾡이처럼 빛났다. 이들이 돌아간 후 세자관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긴급 구수회의가 열렸다.

"정명수가 몹시 성이 나 있으니 장차 형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먼저 강효원을 중죄로 다스려 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본조에서 죄를 다스리게 하여야 한다고 정뇌경을 본국으로 빨리 출송하여 합니다."

세자관 앞길에 형틀이 마련되었다. 형틀에 엎드린 강효원의 엉덩이에 곤장이 작렬했다. 때 아닌 매타작에 지나는 청나라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모여들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강효원이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역관을 음해한 중죄인은 우리가 다스리겠다."
곤장놀음도 소용이 없었다. 형부 관원이 들이닥쳤다.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조선법도대로 다스려야 합니다."
빈객 박노가 막아섰다.

"조선 백성도 우리 백성이니 우리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들이닥친 형부 관원이 정뇌경과 강효원의 손을 뒤로 묶어 끌고 갔다. 뒤이어 사서 김종일을 불러갔다. 김종일이 형부에 도착하니 형부상서 질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원이 앉아 있고 정뇌경과 강효원이 형틀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었다.

"정뇌경과 강효원이 두 역관을 모해한 일을 세자와 재신(宰臣)도 알고 있었는가?"

"모르는 일입니다."

"세자가 만일 모르고 있었다면 반드시 황제께 결백을 맹세하고 죄인을 이곳에서 죽여야 결백이 증명될 것이다. 돌아가서 세자에게 그리 알려라."

돌아온 김종일의 보고를 받은 소현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조국을 배반한 매국노를 제거하려는 신하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태그:#소현세자, #정뇌경, #정명수, #강효원,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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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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