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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이번에 미국과 쇠고기협상을 타결함으로 인하여 국민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고 있다. 애초에 쇠고기협상에 대해 국민적인 논의 하나 없이 독단으로 밀어붙이고, 당사자인 한우농가와 이야기 한마디 없이 단독으로 밀어붙여 타결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협상의 자세한 내용 또한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거센 후폭풍도 예상되고 있다. 당장 한우를 기르는 축산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인 소비자들도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상황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단독적인 쇠고기협상에 큰 불만을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외교적 자세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다. 사실상 ‘조공외교’라는 비판이 절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받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으면서, 정작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협상을 마쳤다는 이유에서이다. 한미FTA 자체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이번 쇠고기협상에 대한 자세는, 방미선물, 방미조공이라는 말도 나온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렸다 왔다. 여기에서도 논란이 되는 것이 일본의 아키히토 덴노와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인데, 이를 가지고 국민들은 또 한 번 분노하였다. 그러한 이명박 대통령의 자세는 마치 상국에 몸을 낮추는 것처럼 보여 일제강점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애초에 실용외교라고 말하면서 친미(親美), 반미(反美) 등 외교적 노선을 구분하지 않는 국익을 우선시하는 외교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이러한 노선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대놓고 대외적으로 말하는 것은 문제다. 외교라는 것은 그렇게 실용외교라고 말하면서 자기 이득만 찾는 것이 아닌, 외교적 수사 등을 씀으로서 직설적이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실리를 찾아가는 게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3월 11일 외교통상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친미도 친중(親中)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국익이 서로 맞으면 동맹이 될 수 있고 국익에 위배되면 동맹이란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른바 ‘실용외교’의 강조인데,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조선일보마저도 사설을 통해 이러한 발언에는 주의를 기해야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고려를 떠올려본다. 1천 여 년 전에 한반도에 존재한 고려. 그들은 그 당시 어려운 국제상황에서 어떻게 외교를 하였을까?

 

서희, 떠오르는 태양 거란의 진영에 당당히 걸어 들어가다

 

 

고려 외교를 말하면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서희이다. 서희(徐熙 : 942 ~998)는 거란과의 외교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었다.

 

당시 거란은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었다. 유목민은 한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굉장한 에너지를 내면서 그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이러한 힘은 단시간에 퍼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힘은 주변국들에게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고려로서는 거란이 신흥 강대국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이 굉장한 위협이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국론은 둘로 양분되었다. 주전론과 화친론으로서 거란과의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화친론자 중에서는 할지론(割地論)이라고 하여,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기자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서희의 생각은 달랐다.

 

서희는 절대로 땅을 넘겨주면 안된다고 하면서, 거란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니 그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의중을 알고 그에 따라 대처하는 것이 낫다고 성종을 설득하였고, 그러한 서희의 설득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서희는 성종의 명을 받고 거란의 진영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소손녕을 만나 당당하게 외교에 임하였다. 소손녕은 서희가 오자 신하국의 예로서 절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서희는 서로 대등한 나라라며 바로 거절하였고 아예 숙소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결국 소손녕은 한발 물러 서희를 맞이하게 되었다. 서희는 소손녕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고려사>를 보면 당시 소손녕은 서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가 침식(侵蝕)하였고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는 고로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으면 가히 무사할 것이다.”

 

그러자 서희는 이렇게 응대한다.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東京)은 다 우리 경내(境內)에 있거늘 어찌 침식(侵蝕)이라 하리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의 안팎도 또한 우리의 경내(境內)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거(盜據)하여 완힐하고 변사(變邪)하여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한지라 조빙(朝聘)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女眞)을 쫓고 우리 구지(舊地)를 돌리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수빙(修聘)하지 아니하리오. 장군이 만일 신의 말로써 천총(天聰)에 달하게 하면 어찌 애긍(哀矜)히 여겨 가납(嘉納)하지 아니하리오.”

 

서희의 대답은 당당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며 현재 고려와 거란이 통교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라 하였다. 사실 거란이 원하던 것은 바로 고려와의 동맹이었고 여진에 대한 경계였다. 거란은 중국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뒤에는 강대한 군사대국인 고려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고, 여진 또한 경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심중을 서희는 정확하게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게 된다.

 

외교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몰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이다. 서희는 이러한 점을 모두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 원칙에 따라 외교를 행하였다. 이 외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강동 6주는 거란과 몽골과의 싸움에서 적의 침략을 막는 요새로 크게 활용되었다.

 

세계 최강의 몽골에 항복, 그러나 한쪽 무릎만 꿇다

 

 

이러한 고려의 외교는 서희 외에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예가 바로 몽골과의 외교인데, 몽골은 당시 세계 최강의 강대국으로 떠올랐고 그들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혀 멸망하 나라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 최강의 몽골에게 고려는 어떠한 자세를 취했던가?

 

고려는 대몽항쟁을 결의하였고 30년간 몽골의 침략을 버텨왔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조건 옳게 평가하긴 힘들다.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김으로 인하여 고려 왕실과 최씨 무신정권은 그들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사치를 그대로 부릴 수 있었지만, 정작 백성들은 몽골의 말밥굽 아래에서 처절하게 짓밟히면서 고통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천도한 것을 옹호하기보다도, 그 후의 자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는 결국 몽골에게 항복하게 되었으며, 이후 몽골에 의해 여러 간섭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몽골의 속국에 들어가지 않는, 즉 직접지배를 받는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본디 몽골은 정복대상 국가에게 6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를 수용하라고 압박하였다. 그 6가지 조건은 왕족이나 자제를 몽골에 인질로 보내는 것, 해당 국가의 재정원을 파악하는 호구조사, 몽골군에게 식량을 바치는 것, 정복사업에 군사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다루가치의 주둔과 역참의 설치이다.

 

이 중에서 고려는 몽골에게 인질을 보내는 이른바 입질(入質)도 제대로 행하지 않았다. 몽골은 당초 국왕이 직접 오라고 윽박질렀다. 결국에는 고려국왕 고종의 아들인 원종이 가게 되었었다. 게다가 호구조사와 식량과 조세의 수납 등은 몽골이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요구조건을 고려가 수락하게 되면 고려는 그야말로 몽골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었기에 고려 정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조건들을 거부하였고, 결국 고려의 외교전략은 성공하였다.

 

당시 고려와 몽골의 위치를 생각할 때, 저 정도의 외교수완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성공하였다고 본다. 고려는 당시의 현실을 명확하게 분석하고, 또한 그에 맞추어 최대한의 국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외교를 펼쳤다.

 

고려의 자주실리외교 vs 이명박의 사대실용외교

 

이러한 고려의 외교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주실리외교라고 하겠다. 자주적으로 외교에 임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그러면서 이익을 위해서는 벼랑끝 외교도 마다하지 않고, 몽골에 의하여 짓밟혀 두 무릎을 꿇고 간곡히 항복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한쪽 무릎만 꿇고 오히려 몽골의 요구조건을 약화시켰다. 그러한 고려의 외교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반면 이번 이명박정부의 외교는 그러한 고려의 외교와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실용외교라 하였는데 이는 국익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고려의 그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것이며, 어떤 이득을 얻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에서 우리가 내 준 것이 너무나도 많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그 결과 결국 북한의 문을 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순차적으로 계속 추진해 나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 중국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면서 북한을 상대하고 있다.

 

미국과의 쇠고기협상에서 우리가 얻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으나 그 쇠고기의 위험성은 굉장히 높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당당하게 그에 따른 권리를 따지기보다도 한미동맹 강화라는 명분으로 졸속협상을 하였다. 외교의 기본은 양국이 서로 같은 위치에 서서 조율을 해가며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거늘, 너무나도 ‘터프’하게 처리한 이번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상대국에 대해 대등한 입장이 아닌 일단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며 상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상대국 원수의 골프 카트를 대신 몰고, 또 다른 나라의 원수에게는 고개를 두 번 숙이며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 이러한 실용외교는 정확히 말해 사대실용외교라고 표현해야하지 않을까?


태그:#고려, #이명박, #실용외교, #서희,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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