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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은 지금부터 89년 전인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지금 남한 정부는 헌법에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하지만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기념일이 어느 날인지조차 모르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북한 역시 이 날을 기념일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국 상해임시정부는 남북한 양자로부터 홀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일면 씁쓸한 일이기는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 날이 남북한 양자로부터 홀대 받고 있는 사실은 오히려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역설적으로 강화해 주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이 선포될 당시만 해도 남과 북의 분단은 없는 상태였다.

 

임정수립 제1 공로자 예관 신규식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제1 공로자는 단연 예관 신규식을 들어야 한다. 그는 의병운동이 실패하자 지금 돈으로 10억에 달하는 사재를 털어 상해로 진입한다. 그는 망명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을 위해 상해로 진출한 것이다.

 

그는 '동제사(同濟社)'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면서 임시정부의 초석을 닦는다. 또한 그는 이상설을 추대하여 신한혁명당을 만들기도 하고,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결성하여 '대동단결선언'의 산파역을 담당한다. 이후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만드는데 바로 위 세 단체, 즉 동제사와 신한혁명당과 신한청년당 등이 합쳐져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것이었다.

 

1919년 3월 신규식 등은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3층 건물을 얻어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한다. 여기에는 여운형, 선우혁 등이 가세한다. 그들은 숙의 끝에 1919년 4월 10일 ~ 4월 13일을 임시의정원회의 개최 기간으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 독립지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신규식과 박찬익, 서병호 등은 그들을 영접한다. 여운형의 노력으로 이동녕, 이시영이 상해로 복귀하고 김동삼, 조성환 등이 상해 정착을 결정한다. 이어서 국내에서 파견한 현순, 손정도 등도 합세한다. 그들 중에는 동경에서 2·8선언을 하자마자 도피성으로 상해에 온 이광수도 끼어 있었다.

 

이렇게 임시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가던 중 뜻하지 않은 소식이 들린다. 3월 17일 러시아에서 한족중앙회를 이끌던 문창범이 독단으로 대한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정부 수립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는 국내에 있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위촉했다.

 

하지만 상해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마침내 4월 10일 각계 대표가 모여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다. 이 모임에는 약 850명의 독립지사들이 대거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한다. 국내 8도 대표와 러시아 령, 중국 령, 미국 령 등 3개 지역 대표가 모여 의정원 의원 57명을 선발했다. 의정원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가 선출되었다.

 

의정원은 정식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한다. 미국과 국내 인사가 지지하고 당대 최강국 미국의 힘이 배경이 되어 이승만이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의 내각을 구성하여 정부 수립을 세계에 선포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1919년 4월 13일 오전 10시였다.

 

당시 중국 신문 중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신보· 申報, 1872년 창간>는 한국 독립지사들의 동정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상세히 보도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상해에서 한국임시정부 성립

- 한국인 6명이 어제 안동 순찰병들의 눈을 피해 상해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의 임시정부에 협조하는 요인들인데 임시정부의 총리는 이들에게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보낼 청원서 초고를 작성하게 명하였다. 이씨라는 한국인은 어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잠입했는데, 이 사람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한국 영도자였다.

- 현재 상해에는 한국의 입시의정원 의장과 부의장 등이 모두 체류하고 있고 내무 사법 재무 교통총장 등도 상해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 공무총장은 이미 며칠 전에 북방을 통해 상해에 왔다고 한다.

- 몇 주일 전 상해 하비로 321번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회를 소집하였는데, 한국 8도에서 한 도에 3명씩 비밀리에 선거하여 뽑은 대표 24명 중 21명이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만주와 미국, 러시아 등지의 한국인도 각각 대표 3인을 선출하여 파견했다. 이번 국회에서는 임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뽑았다.

 

임시정부도 분단정부를 인정치 않았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은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해왔다. 그런데 반으로 나뉘어 따로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두 편 모두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이 상해임시정부를 홀대하는 것은 친일, 친미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된다. 그리고 북한이 상해임시정부를 우대하지 않는 것은 임시정부가 훗날 우익의 성격을 띠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과 북 두 정부가 상해임시정부를 홀대하듯이 상해임시정부 역시 분단된 정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김구는 "반편으로 쪼개진 정부라면 100개가 선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분단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남과 북 두 정부와 상해임시정부는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상해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룬 뒤에야 제대로 자리 매겨질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김갑수 기자는 작가로서 오마이뉴스에 항일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신규식, #동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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