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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할 정도로 한가하게 보이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함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지요.
 삭막할 정도로 한가하게 보이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함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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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가로움이 넘치는 지방의 작은 도시(군산) 풍경에 지나지 않지만, 저에게는 많은 추억과 사연이 담겨있는 소중한 사진입니다. 직선으로 뻗은 길은 등굣길이었고, 집과 가장 가까운 로터리였으며 지금의 '전군도로'와 이 길을 통해서만 군산을 드나들 수 있던 큰길이었거든요.

로터리 왼쪽은 골목으로 유명한 '중동 274번지' 입구이고, 오른쪽은 '공설시장(구시장)'을 거치는 시내 진입로입니다. 뒤쪽은 복개공사로 형체가 사라진 '째보선창' 가는 길이고, 옆에는 성산, 나포, 웅포행 버스 정류소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정문 앞이라서, 국경일이면 학생들 시가행진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시골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기도 합니다. 집에서 기른 닭과 염소를 장에 내다 판 돈을 시골 장꾼들을 노리는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울며 걸어가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몇 번 본 기억이 있거든요.

김장철에는 시골에서 지게와 달구지에 배추와 무를 바리바리 싣고 나왔는데, 새벽의 달구지 바퀴가 신작로에 박힌 자갈을 짓누르는 소리가 골목을 타고 들어와 단잠에 빠진 저를 깨우기도 했습니다.

금방 간판이 걸린 건물은 방앗간 자리이고, 그 뒤로 만화방, 소금 집, 쌀가게, 식당, 주조장, 연탄공장, 벽돌공장, 기와공장, 문 공장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3층 건물은 공설운동장 정문이 있던 자리인데, 운동장이 주택단지가 되자 도로를 따라 뻗어있던 담벼락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길 끄트머리에는 피난민 촌과 돌산(石山)이 있었는데, 꼭대기에 교회가 있는 제법 큰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채석작업으로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는 평지가 되었습니다. 왼편으로 100m쯤 가면 '경포교'가 있었는데 '설애다리' 혹은 '물문다리'라고도 했습니다. 

'설애'를 '서래'라고도 했는데, 어느 게 정확한지는 향토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스래'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틀린 발음인 '스래'가 더 친근감이 있고, 고향의 정취를 풍기는 것 같습니다. '물문다리'는 금강으로 유입되는 경포천에 설치된 수문을 의식해 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포천은 여름에는 아이들의 야외 수영장으로 변했는데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 가슴을 아프게 했지요. 겨울에는 꽁꽁 얼어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고, 빨래터이기도 했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빨랫방망이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옥산, 조촌, 경암 들녘의 농수로 물이 모이고 모여 '꺼먹다리'를 거쳐 경포교에서 잠시 쉬었다 금강으로 유입되는데, 논바닥에서 잡은 우렁이는 된장도 제대로 담가 먹지 못하던 시절의 여름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습니다.

경포교는 버스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였고, 겨울에는 귀가 잘려나갈 것 같은 찬바람이 매섭게 불었습니다.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질 땐 수문을 열었는데,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거품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며 장관을 이루었지요.

기(旗)를 들고 '용진가'를 합창하며 다녔던 등굣길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쓴웃음이 나오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어깨에 총을 멘 군인들이 좌측통행을 어기는 사람들을 로터리 중앙에 몇 시간씩 세워두곤 했거든요.  

우리는 군인도 아니면서 혁명공약을 외워야 했고, 이곳 로터리에 모여 용진가를 부르며 등·하교를 하는 등 군대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훗날 북한을 비판하는 방송에서 평양 학생들이 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등교하는 것을 보고, 북한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원래는 '중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5학년이 되던 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개혁이랍시고 한 게 학구제 개편이었습니다. 학구제 개편으로 상가를 구경하며 10분이면 갈 수 있는 학교를 놔두고 30분 가까이 걸리는 '구암국민학교'를 다녀야 했으니까요.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었고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와 겨드랑이 밑으로 묶고 다녔는데, 뛰어갈 때는 양철필통에서 연필 굴러다니는 소리가 요란했으니까요. 학교에 처음 가던 날 턱에 수염 난 친구가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봄에는 경포교까지 올라온 똑딱선 선원들과 생선 장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벌이는 흥정을 구경하며 다녔고, 여름에는 농수로에서 수영하며 물고기를 잡고 놀았습니다.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 논둑길을 줄지어 걸으며 '용진가'를 불렀는데, 당시 모습이 시나브로 떠오르네요.

학교에 다니는 길 주변 풍경이 계절마다 바뀌었고, 함께 웃고 울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춥고도 먼 길임에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도 달라졌고 길도 넓어졌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바뀌었습니다. 경포천이 매립된 지 30년이 넘었고, 들녘에는 빌딩과 주택이 들어서 옛날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던 가로수들과 들녘의 허수아비 아저씨들,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써레질을 하는 아주머니 옆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던 호롱기(탈곡기) 소리도 이제는 추억의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되살려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질없는 짓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해서 그렇게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사라졌다고 아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찾아보는 것도 작은 지혜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추억은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용진가: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부가 학생들에게 배우게 한 군가입니다.
가사는 '백두에 베른 칼이 공중에 번쩍/ 두만에 닦은 용맹 사해에 난다/ 나아가는 우리앞길 누가 막으랴/ 힘차게 용진한다 하나 둘 셋··/ 나가자 앞으로 대한용사들아···'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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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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