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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만일 "당신, 발목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거, 참 별 할 일 없는 사람이 별 할 일 없는 질문을 하고 있네"라고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좀 더 진지하다면 "발목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지금 걷고 있고, 운동을 하며 운전을 할 수 있는가"라며 나름 논리를 갖춰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의학계에 종사하거나 인체 해부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발목은 인체 하지(下支) 부분 경골(tibia)과 비골(fibula)이 복사뼈(talus)와 만나는 부분에 있는 관절"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답은 뻔한 것 같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바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법정에나 가야 얻을 수 있다.

[도전] 족병(足病) 전문가들 "발목은 없다"

한국에 없는 족병(足病) 전문가(podiatrist, 이하 포디)라는 직업이 미국에는 있다. 티눈이나 굳은 살, 당뇨로 인한 신경마비 등 발에 생기는 각종 질병을 독자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학계의 전문 직종이다. 일반 의사(Doctor of Medicine), 치과 의사(Doctor of Dental Science) 등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미국에서 족병 의사(Doctor of Podiatric Medicine) 대우를 받는다.

지금 미국에서는 발 전문가인 이들과 정형외과 의사(orthopedist)들 사이에 발목 관련 치료가 서로 자신의 분야라며 법정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 전문 직종들 간의 싸움인 만큼 해부학적 지식이 총동원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발목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부분이다. 포디들에 따르면 발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이라는 것 자체가 해부학적으로 이미 발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

발뼈를 다리에서 떼어내면 발목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형외과 의사들이 주로 하고 있는 발목 관련 부상이나 질병, 그와 관련한 수술을 자신들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텍사스주 제3항소법원에 최근 소송을 냈다. 미 전역에 1만2000여 명에 달하는 포디들이 법원의 결정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중 한 명인 토마스 고니스는 일반 대학 4년, 포디 전문대학 4년, 수 년 간의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시에 포디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당뇨 합병증으로 발목 부분을 절단해야 하는 수많은 환자들을 수술로 구해낸 바 있다"며 "(패소는) 병원 문을 닫아야 하는 재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형외과 의사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반박] 정형외과 의사들 "발목이 없다면서, 치료한다고 나서는 건 뭔가"

반면, 정형외과 의사들은 "발목은 있다"며 승소를 확신하고 있다. 데이빗 투셔 전 텍사스 정형외과 협회장은 "포디들이 발목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서 왜 그들은 그렇게도 없는 발목 치료를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가"라며 쏘아붙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발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발목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정식 의대에서 의사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텍사스 의사협회 윌리엄 힌치 박사도 "포디들은 그들이 이제껏 해 왔던 대로 발에 생긴 티눈이나 당뇨 합병증 치료 등에만 전력해야 한다"며 "그 외의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정식 의대 교육을 수료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그는 법원이 상식적인 판단을 해 자신들이 승소할 것을 확신한다며 "(승소는) 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포디들은 "4년간의 포디 전문대학 교육은 같은 기간의 의학 전문대학 교육과 별 차이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5년간의 레지던트 기간 중 발과 발목에 관해서는 불과 12주밖에 교육을 받지 않는다"며 "포디가 되기 위해서는 2, 3년의 레지던트 기간 동안 발과 발목에만 집중해서 수련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한 정형외과 의사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부학적 논쟁? 밥그릇 싸움에 불과

발 주위 X-ray사진. 발목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법정 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 사진을 단순히 '발목 사진'이라고 할 수 없다.
 발 주위 X-ray사진. 발목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법정 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 사진을 단순히 '발목 사진'이라고 할 수 없다.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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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의 본질은 의사나 포디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단한 해부학적 논쟁이 아니다. 결국은 밥그릇 싸움에 돈 싸움이다. 이들의 싸움을 보는 네티즌들은 이미 이를 간파했다.

온라인 언론매체 <론스타타임즈>의 관련 기사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 내용이다.

정형외과 의료기구 제조업계에 종사한다는 'voltrey'라는 네티즌은 "(이 소송은) 결국 돈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미 정형외과 의사들은 당뇨 합병증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환자들을 돈이 안 된다며 포디들에게 보내고 있다"며 "이를 받은 포디들은 발목은 물론 그 윗부분의 절단 수술까지 맡고 있다"고 의료계 현실을 고발했다.

다른 네티즌 'bonecrusher'도 "AMA(미국의사협회)가 미 전체 의료 체계를 좌지우지한다"며 "(이들의 논쟁에 휘말리지 말고) 결국은 환자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책임지는 게 더 낫다"고 비꼬았다.

결국 정치적으로 센 쪽이 이길 것

하지만 일단 걸려 있는 소송의 결말은 봐야 한다. 분위기는 대강 의사들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쪽수'에서부터 포디는 밀리고 있다. 미 전역에 20만 명이 넘는 의사가 있는 데 비해 포디는 그것의 2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돈의 힘으로도 포디를 훨씬 능가한다. 미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정형외과의를 포함한 외과의사(surgeon)들의 평균 연봉은 18만 달러(약 1억8000만원)인데 반해, 포디들은 12만 달러(약 1억2000만원)에 불과하다. 당연히 의사들이 내는 정치 헌금이 포디들을 능가할 수밖에 없다.

약발은 즉각적이다. 텍사스주 상원 보건위원회 회장인 밥 듀엘은 "일부 포디들은 발 이외 부분의 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며 의사들의 편을 들고 있다.

텍사스 출신 연방 상원의원인 존 코닌도 "포디들이 발 이외 부분 치료를 담당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결국 발목이 존재할 가능성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력에 의해 결판날 판이다.

미국식 소송 만능주의의 병폐

바지 한 벌을 분실하고 한인 세탁업자에게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가 1심에서 패소한 미국 행정법원판사 로이 피어슨(왼쪽)이 기자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바지 한 벌을 분실하고 한인 세탁업자에게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가 1심에서 패소한 미국 행정법원판사 로이 피어슨(왼쪽)이 기자로부터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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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포디들의 싸움은 미국식 소송 만능주의의 병폐를 보여준다. 전문가들끼리 결론짓지 못하는 '발목 있다, 없다' 논쟁을 비전문가인 판사가 판단해야 할 처지다. 누가 이기든 막대한 소송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인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만일 포디 측이 진다면 이들은 의학 문제가 아니라 왜소한 정치력을 탓하며 더 많은 정치 헌금을 모을 것이다. 환자들이 내는 돈은 의학 발전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선거 자금으로 쓰일 것이다.

알려진 대로 미국은 소송 천국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2초마다 한 건의 소송이 있고, 전체 GDP의 2.2%가 소송비용에 쓰인다. 바지 한 벌 잃어버렸다고 6500만 달러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재미 한인동포의 이야기는 미국에서 억지로 꾸며낸 얘기가 아니다.

미 기업들은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세탁기에 사람 넣지 마세요",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말리지 마세요"라는 괴상한 문구를 제품에 붙인다. 이 모든 유무형의 비용은 사회적 불신을 증대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밥그릇 싸움에 상쇄되는 전문화의 장점

또 이들의 싸움은 미국식 전문화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의사와 포디의 갈등은 지나친 전문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미국은 대학교육은 물론, 사회 전 분야가 전문화를 지향한다. 의사만 해도 MD, DO, DPM, DDS 등으로 나뉘고 내과, 외과 등 세부 전공으로 나누면 그 수를 세기에도 벅차다. 그 외에도 의사 보조사(Physician Assistants), 치열교정사(Orthodontists), 보철전문가(Prosthodontists), 검안사(Optometrists) 등 수많은 전문가들이 각자 자기 영역을 구축하며 외부의 침입을 불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의사와 포디 싸움과 다름없는 제2, 제3의 밥그릇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에 현재와 같은 경제적 위기가 계속된다면 각 전문가들은 살기 위해 타 전문가들의 영역을 넘보게 될 것이다. 전문화의 장점이 밥그릇 싸움으로 인한 손실에 상쇄될 날도 멀지만은 않다.

이명박 정부는 '오륀지' 발음부터 모든 걸 미국식으로 따라가려 한다. 제발 새 정부가 바라는 미래 한국이 소송이 난무하고, 전문가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해 우르르 법원으로만 달려가는 사회가 아니길 바란다.


태그:#발목 소송, #소송천국, #정형외과, #전문화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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