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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우리뿐이었다. 자전거를 탄 한 떼의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먼지 가라앉듯 차분하게 가라앉는 골목. 우리는 아무런 목적 없이 알 수 없는 골목골목을 그저 걸어 다닐 뿐이다.

 

사핑에서 고성으로 돌아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이곳 시저우(喜州) 마을의 골목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래도 내부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높다란 벽에 둘러싸인 집들 때문인 것 같다. 우리네 가옥에 있는 담장이란 것이 아예 없다. 주택 건물 자체가 담장이자 벽이다. 구멍가게 앞에서는 아낙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주인 없는 개들이 어슬렁거리며 골목길을 누비고 있다.

 

인적 드문 골목길 어느 곳에서, 손바닥 만한 좌판을 벌여 놓은 할아버지가 먼저 웃으며 니하오, 인사를 건넨다. 이런 비수기에도 기념품 차리고 거두는 일을 하루도 거를 것 같지 않은 행복한 할아버지다. 아니 어쩌면 차리고 거두는 일없이 하루 종일 밤새도록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낼 것만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는, 남들 많이 가는 잘 알려진 길을 택하지 않고 인적 드문 길을 택한 여행자가 후회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도록 거기서 늘 그렇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 길도 괜찮아,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법 가볼만 하거든. 길이란 게 그런 거지, 좀 돌아가더라도 원하는 곳에 닿을 수도 있고. 또 그게 아니라면 돌아돌아 가면서 길 자체를 즐기면 되는 거지, 때로 길은 길일 뿐이야, 어디를 향하고 어디를 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아닌 거야. 어쩌면 네가 찾는 것은 그 길의 끝이 아니라 골목골목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거든, 이렇게 속삭이면서 말이다.

 

 

시저우의 특별한 집

 

어찌어찌 골목을 누비다 보니 우리 가족은 범상치 않은 집을 만나게 되었다. 환영, 이곳은 특별한 집이다, 뭐 이런 의미의 영어로 된 붉은 글씨가 낙서처럼 담벼락에 씌어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안 그래도 ㅁ자 모양의 사합원 구조라는 그 집들의 내부가 궁금하던 차에 웰컴이라니. 우리는 거리낌 없이 그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과연 한가운데 마당이 널찍하고 그 마당은 여러 개의 방들로 둘러싸여 있다. 마당에는 성근 닭우리가 있고 꾀죄죄한 빨래들이 널려 있는 걸로 보아 여러 세대가 사는 곳인 듯싶다.

 

과거에는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마을이라는데 지금은 가난의 때가 덕지덕지하다. 집의 구조가 벽이 높은 ㅁ자인 것도 겨울철 바람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니 따리의 바람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그 대신 햇볕 들일 곳이 없어 집은 많이 어둡다. 그리하여 발휘한 슬기가 바로 집들을 모두 하얗게 회칠하는 일이었다. 하얀 벽면에 빛이 반사되도록. 이제 그 푸른 기와와 흰색의 담장들은 얼하이 호수와 눈 덮인 창산을 상징하고 있다.

 

네모난 마당의 모서리쯤에는 다른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곳엔 작은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 공간 끝에는 또 다른 ㅁ자 공간이 드러난다. 마치 소라 고둥 속을 돌아가듯이 어지럽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중년의 사내가 자신의 집 한 칸 앞에 서서 무언가를 가리킨다. 살펴보니, 90세가 넘는 그의 어머니 사진이 있고 병을 앓고 있는 그 분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의미인 듯싶다. 사진 밑에는 두툼한 방명록까지 있었는데 제법 많은 외국인들이 다녀갔나 보다. 어쨌든 나는 이 집안을 둘러본 대가를 조금은 치를 각오가 되어 있던 지라 상자 속에 흔쾌히 10위안(1위안=133원 정도)을 집어넣었다.

 

사내는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방 안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할머니가 누워 있다는 표시를 한다. 남편은 찜찜한 마음에 그냥 돌아 나가려고 한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 두 평 남짓한 실내는 동굴처럼 어둑신하다. 입구에는 설거지 거리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방 안 구석엔 높은 침상이 있었다. 호기심만큼이나 두려운 생각이 든다. 심하진 않지만 냄새도 나고 방안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 앉아 있는 듯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침상 위를 얼핏 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침구와 기저귀로 쓰이는 듯한 천조각만이 어지러울 뿐.

 

아주 희미하게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로 보아 바로 거기쯤 사람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내 팔뚝 만한 할머니의 상체가 보였다. 돌아누운 할머니의 조막만한 모습은 아기 같았다. 가랑가랑 생명줄을 곧 놓을 듯한 그 뒷모습은 고통스러운 건지 편안한 건지 모를 정도로 고요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오는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집의 내부 구경은 잘 했지만 우리는 마음이 그리 편치 못했다. 세상 어느 곳에나 인간의 생로병사는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낯선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들도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인간의 모든 고통들은 길 위에 널려 있다는 것을 자각한 때문이다.

 

10위안보다 못한 30위안

 

발길 닿는 대로 골목을 따라가다 보니 처음 그 갈림길에 다시 섰다. 이번엔 다른 갈래길을 걸어가 보기로 한다. 짐작했던 대로 그곳은 시저우의 중심가인 듯 제법 화려하고 그럴 듯한 상점들로 이어진 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바늘쌈을 하나 샀다. 웬 바늘쌈이냐고? 도대체 요즘 서울에선 바늘쌈을 살 곳이 없다. 재래시장을 가도, 없는 것 없는 마트를 가도 구할 수가 없던 차에, 지하철에서 천원을 주고 터럭처럼 촘촘하게 잔뜩 꽂힌 바늘쌈을 샀었다.

 

기본 바늘은 물론, 가방 꿰매는 바늘, 매트리스용 구부러진 바늘, 카페트용 바늘까지 구비되어 있더니만 우습게도 바늘이 너무 쉽게 똑똑 부러지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쇠로 만든 게 아니었다. 조금 힘만 주어도 똑똑 분질러지는 허접한 바늘이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 바늘처럼 끝이 날렵하게 뾰족하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중국산일 거라고 투덜거렸는데, 중국까지 와서 진짜 중국산을 구입하는 아이러니라니. 이런 중국의 시골 마을에서 사는 바늘은 진짜 바늘다운 바늘일 거라는 흡족한 생각이 드니 우습기 짝이 없다.

 

시저우의 골목은 재미있다. 목적을 가지고 찾아가지 않아도 어찌어찌 가다보면 가볼 만한 곳은 다 이르게 되어 있다. 마침내 이른 곳은 엄씨가(嚴氏家)였는데 그곳은 방금 우리가 둘러본 골목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국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비싼 입장료까지 받는 곳이라서 우리는 망설인다. 이미 우리는, 약소하게나마 입장료를 지불하고 살아 있는 바이족(白族)의 집안을 구경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가이드북에 소개된 곳이니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워 들어가 본다. 하지만, '외국 여행자들은 골목을 다니면서 실제 바이족들이 사는 모습을 엿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라는 가이드북의 말이 백 번 맞았다.

 

엄씨가는 완전히 상업화된 공간이었다. 방방마다 삼도차와 바틱천을 파는 아가씨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마당 안쪽 공간은 공연을 위해 의자들만 가득 차려놓았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게 돈을 더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10위안짜리가 30위안짜리를 위로한다. 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저우 뒷골목의 집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버스를 타고 돌아 나오는 시저우 마을이 아득하게 사라져갔다. 저 마을의 골목골목에 떨어뜨린 나의 추억들이 꽃잎처럼 바람에 흩어지고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고성에 도착해 숙소로 가는 길 위엔 바람이 휘돌고 있었다. 따리의 바람은 언제 어디서나 몰아치는 게 아니다. 그 순간 그곳을 살짝 벗어나기만 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따리의 바람은 순간의 어느 곳에 멈춰 있는 느낌이다. 막 바람이 휘감고 도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다.

 

멈춰있는 바람이라니. 어쩌면 이 바람은 따리에 내내 갇혀 있는 바람. 차마 새어나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바람. 내 마음까지 이곳 따리에 가두어버릴 것만 같은 삽상한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13일에 떠나 중국 윈난을 여행하고 12월 24일에 돌아왔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카페 '중국여행 길라잡이'에도 올립니다.


태그:#중국 윈난, #윈난 따리, #시저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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