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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를 뚫고 자전거를 타면서 불현듯 오래 전 돌아가신 큰 아버지가 떠올랐다. 3월 4일 오후, 황사 탓에 누런 빛을 띈 눈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아쉬워하듯 지독하게도 흩뿌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외출했다가 모질게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돌아와야 했다.

 

 28년 전, 그날은 더 심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 눈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었다. 6교시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은 학교 근처 농가로 우리들을 데려갔다. 농가 주인에게 학생들 동원해서 무를 뽑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닥친 추위 때문에 황급히 무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동원해서 작업시킨다는 것은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아마! 신문 한 귀퉁이에 기사로 올라올 지도 모른다. “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노동력 착취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아이들 노동력도 요긴했다. 나 역시 일손이 딸리면 학교를 며칠씩 쉬면서 바쁜 농사일을 거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당연히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학교에서 농사일을 시켜도 항의하는 학부모가 없었다.

 

선생님 지시에 따라 정신없이 무를 뽑아 삼태기에 퍼 담았다. 무를 거의 다 뽑았을 무렵 하늘에서 첫 눈이 내렸다. 서린지 눈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내린 것이 아니라 갓난아기 주먹만한 크기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렸다.

 

첫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뛰어야 할 나이였지만 그날은 좋아할 겨를이 없었다. 일이 끝났을 무렵,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했고 옷과 신발은 진흙투성이였다. 눈을 맞으며 질퍽거리는 밭에서 일한 탓이다.

 

일이 끝나자 선생님은 눈보라가 심할 듯하니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집과 학교까지 거리는 약 4km. 12살, 지치고 배고픈 소년이 흙탕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눈보라 치는 허허벌판을 4km나 걷는 것은 무리였다.

 

배가 몹시 고팠다. 반찬 투정을 하느라 아침에 어머니 속을 뒤집어 놓고 홧김에 도시락도 싸오지 않은 날이다. 점심을 굶은 탓에 무를 뽑으면서도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게 보였던 터다. 이런 상황에서 집에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학교 근처에 몸을 의탁할 만한 친척집도 없던 터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죽든 살든 집에 가는 것.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허허벌판 신작로 길을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었다. 잠시 눈보라를 피할 짚누리('노적더미'의 옛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집과 학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다.

 

저녁 무렵부터 시작된 눈보라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거세졌다. 절반 정도 걸어왔을 즈음 위기의식이 들었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쓰러져서 얼어 죽을 것 같다는. 그 뒤부터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걷는 것이 힘들어서 자꾸 눕고 싶었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었다. 갑자기 닥친 추위 탓에 신작로에는 인적조차 없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사람들 눈에 띄지도 못한 채 얼어 죽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먹서먹했던 큰 아버지와의 관계

 

큰 아버지 집이 먼발치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안간힘을 냈다. 큰 아버지 집에까지만 가면 얼어 죽을 위기는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난 큰아버지에게 살가운 혈육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형 누나(2촌) 다음으로 가까운 친척(3촌)이라는 사실도 복잡한 촌수 따지는 법을 알게 된 후에야 알았다.

 

큰아버지는 양촌(충남 예산)과 신리(충남당진) 사이 언덕배기에서 이발소를 했다.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갈 때까지 줄곧 큰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겼다. 큰아버지 특기는 머리 쥐어박기였다. 머리를 깎는 도중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졸게 되면 어김없이 꿀밤이 날아왔다.

 

꿀밤 맞기 싫어서 머리 깎을 때가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기 바빴다. 큰아버지 이발소가 아닌 학교 앞 이발소에 가기 위해서다. 몇 년 동안  큰아버지 집 앞을 지나 학교에 오가면서도 난 머리 깎을 때 외에는 집안으로 들어가 본적이 없다. 참으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6살 터울 사촌형하고도 서먹서먹하기는 마찬가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아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장학생으로 간 사촌형은 전형적인 공부벌레였다. 방안에서 책만 파고 있을 뿐 좀처럼 밖에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명절 때가 아니면 만날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 댁 문 앞에서 “드디어 왔다. 이제 얼어 죽을 일은 없다”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어린 조카 녀석이 어른들도 밖에 나다니지 않는 엄동설한에 흙투성이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반기지 않을 거란 생각은 기우였다. 그날 난 극진한(당시 상황으로는) 대우를 받았다. 배고픔을 참고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온 얘기를 하자 혀를 끌끌 차며 맛있는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날부로 큰아버지와 사촌형과의 서먹서먹했던 관계는 끝났다. 젖은 옷이 마르는 동안 사촌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골 마을에서 천재라고 소문난 사촌형은 그날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세계적인 위인 얘기부터 음악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형은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시도 쓰고 기타 연주도 즐기고 있었다.

 

몇 년 후, 큰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곧이어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 영전을 보며 그날 밤이 생각났다. 서먹서먹한 조카와 삼촌이 혈육의 정 느끼라고 그렇게도 지독하게 눈보라가 휘몰아 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처럼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또다시 큰아버지가 생각났다. 눈보라 속에서 자동차 사이를 헤집으며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 타는 것이 위험스러워 살짝 위기의식이 스칠 때 28년전 그날이 생각났다. 

 

3월 4일 내린 눈은 올 겨울 마지막 눈이었다. 눈은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해 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눈, #혈육,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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