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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눈 내리는 신륵사 풍경 봄눈이 흩날리는 신륵사와 여강 풍경을 바라보며 떠올린 고려말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요 시인이었던 목은 이색 선생의 시 한 수가 강변 풍경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겨울 낭만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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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물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이색

청구영언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고려 말 조선초기의 지조 굳은 학자 목은 이색 선생의 시 한 수다. 이 시(詩)에서 구름은 간신의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고, 매화는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지사를 일컫는 비유다. 또 석양은 기울어가는 고려조의 운명을 일컫는 말로 망해가는 고려 왕조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강변의 강월헌과 나옹선사 다비기념비
 여강변의 강월헌과 나옹선사 다비기념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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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그였지만 목은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아꼈다. 그래서 스스로 세운 새 왕조에서 등용하려고 간곡한 청을 몇 번이나 했으나 목은 선생은 끝까지 지조를 지켜 조선조에 출사하지 않은 인물이다.

4일, 많은 봄눈이 쏟아지는 바람에 길이 막혀 등산을 포기하고 찾은 곳이 남한강(여강) 줄기 봉미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여주 신륵사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도자기단지와 함께 조성된 공원 연못에 청둥오리 한 쌍이 정답게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유롭기만 하다.

봄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신륵사 경내에 들어섰지만 마당을 쓸고 있는 불자를 한 명 만났을 뿐 절집은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마당의 5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와 구룡루를 지나 극락보전을 둘러보고 절 뒤편으로 향했다.

뒷마당에는 역시 400여년이 지난 향나무와 함께 조사당 등 오래된 전각들과 보물 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절을 한 바퀴 돌아 강변으로 나오자 벽돌로 쌓은 특이한 모양의 높다란 탑이 눈길을 붙잡는다. 이 탑이 보물 226호인 다층전탑이다. 그러나 전탑보다도 더 멋지고 운치가 있는 전각은 강변의 정자 강월헌(江月軒)이었다.

나옹선사의 다비장소에 기념으로 세웠다는 작은 돌탑 옆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정자는, 봄눈 내리는 강변 풍경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휘날리는 눈발 아래로 강물은 굽이쳐 흐르고, 그 강물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운 정자가 금방이라도 눈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풍경이었다.

신륵사 극락보전
 신륵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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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뒷편 풍경
 신륵사 뒷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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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의 지조 높은 정치가이며 선비요 학자였던 목은 이색선생이 남긴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덧없는 인생 홀연히 어디로 가야하나" 강물처럼 영원한 세월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의 짧은 삶이 덧없기는 선생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홀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야하나
여강 한 구비 산은 한 폭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은 시인 듯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떠돌이 삶일진대
고향 따지고 인연 물을 것 없다.
세월은 백대를 지나가는 과객이요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다
내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리라

- 목은 이색의 시<여강의 술회> 모두

쇠퇴하고 있는 왕권과 기울어가는 국운, 격동하는 대륙을 바라보며 같은 친명파로 뜻을 같이 했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선생은 피눈물을 흘리며 한산으로 낙향한다. 그 때쯤 그는 이미 역성혁명을 도모한 왕조개편 세력에 의하여 두 아들을 잃은 후였다.

멀리 여주시가지가 바라보이는 강변 풍경
 멀리 여주시가지가 바라보이는 강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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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강변 풍경
 눈 내리는 강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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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한 후에도 태조 이성계는 그의 입조를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고려조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의 목은선생에 대한 극진한 예우와 신임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결국 선생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1396년(태조5년) 5월 7일, 목은 선생이 신륵사를 찾아 여강의 연자탄 청심루 아래 제비여울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이방원 일파가 보낸 사람이 왕이 내린 어주(御酒)라며 술 한 병을 권했다. 이를 의심한 승려들이 만류했지만 선생은 기꺼이 그 술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고려조를 섬기며 문하시중으로 최고의 관직에 오른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대가요 고려시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목은 이색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말의 삼은으로 불렸던 목은 이색의 <여강의 술회>라는 시 한 수는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지은 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쩌면 이곳에서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덧없는 짧은 생을 아옹다옹 살아가는 인간들과는 달리 억겁의 시간을 말없이 지켜본 강물은 눈발 속에서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때를 잊은 봄눈은 펄펄 쏟아져 내리고, 흐르는 강물에 청둥오리 몇 마리 하릴없이 헤엄치는 모습이 추워 보인다.

"반쯤은 구름인 듯, 반쯤은 시인 듯. 정말 목은 선생의 시 구절처럼 아름다운 풍경이구먼."

일행 한 사람이 강물과 정자를 바라보다가 감탄하는 말이었다. 봉미산 자락을 감싸고 흐르던 여강이 강월헌 정자 밑에서 여울을 이루며 휘돌아가는 모습이 목은 선생의 시 한수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신륵사, #목은 이색, #청구영언, #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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