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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대둔산
 
대둔산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 남쪽으로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이, 서북쪽으로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이, 동쪽으로 금산군 진산면이 펼쳐져 있다. 기암괴석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우리나라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예전엔 완주군 쪽에서 올라갔지만, 이젠 논산군 벌곡 군지계곡 쪽에서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쪽이 볼거리가 많고 경치가 훨씬 수려하기 때문이다.

 

대둔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태고사를 찾아간다. 금산군 진산면 소재지를 향해 복수면 신대리 삼거리에서 우측 길로 접어든다. 이윽고 대둔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산줄기들이 교회당 첨탑에 걸려 있다. 그냥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오브제를 거쳐서 바라볼 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른가. 첨탑이라는 존재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짝 건드려 감흥을 일게 하는 것이다. 술술 거침없이 읽히는 책보다는 한 줄 읽고 나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 더 좋듯이.

 

저수지를 지나자 '이정표'씨가 불쑥 튀어나와서 태고사까지 2km가 남았다고 일러주고 나서 금세 사라진다. 산 중턱의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여기가 바로 대전 시내를 흐르는 갑천의 발원지인 장군약수터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자 바위와 바위틈 사이로 작은 문 같이 생긴 석문이 나온다. 이 '석문'이라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글자로 알려져 있다.

 

석문을 통과하고 나서 위를 올려다보니, 저 만치 태고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석문이 일주문 노릇을 하는 셈이다. 문 밖은 세간이요, 문 안은 출세간이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수많은 돌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불전들이 늘어선 절 마당에 올라선다.

 

태고사는 대둔산 낙조대 아래에 있는 절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 태고화상이 중창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가 재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거쳐간 셈이다. 이것은 태고사 터가 좋다는 뜻인가. 그 세 분 스님이 그만큼 오지랖이 넓다는 뜻인가.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운 도천 스님

 

 

그렇게 유서깊은 절이었지만, 태고사 역시 6·25의 참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폐허로 변해버린 태고사를 중창한 분은 도천 스님이시다.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불사를 계속한 끝에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선방 등의 전각을 두루 갖춘 것이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수많은 돌계단을 쌓아올렸다는 점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현재의 가람 모습에서 폐허가 돼버린 태고사의 모습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겠는가. 대웅전을 둘러보고 나와서 잠시 마당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선방의 문이 쓰윽 열리면서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이분이 바로 도천 스님이신가 보다. 1910년생이니 세상 나이로 헤아리면 아흔 아홉이다. 그런데도 눈빛이 아주 형형하다니!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신 스님은 중이 되고자 수월 스님을 찾아서 금강산 마하연으로 갔다고 한다. 수월 스님은 근대 선맥을 일으킨 경허 스님의 제자다. 그러나 수월 스님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수월 스님의 상좌인 묵언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했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 신계사 묘향산 유점사 법왕사 등에서 20여 년 간 수행을 계속하던 스님은 6·25가 일어나자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여러 선방을 거친 끝에 스님은 금강산의 형세를 닮은 대둔산 태고사로 들어왔다.

 

태고사까지 빨치산이 들어왔지만 요행히 살아남았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부처님 덕택이라고 여긴 스님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선 태고사를 버젓하게 다시 짓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불타버린 태고사 터에 움막을 짓고 중흥 불사를 계속해왔다. 40년 간이나 두문불출하면서, 할아버지인 수월 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백장청규의 정신을 철저하게 구현한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는 백장청규란 스님에겐 차라리 사치스런 것이었을 것이다. 나물죽 끓여 먹기도 어려울 때가 있었다니 말이다.

 

스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도인'이라고 하면 "나는 도인이 아니라 머슴이요"라고 고쳐서 말씀하신다고 들었다. 실상사 도법 스님도 스스로를 '부전'이라고 말한다. 부전이란 건물 관리를 맡은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내 곁으로 가까이 오신 스님이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는다. "부처님은 뵈었어?"라고.  난 스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여쭌다.

 

"스님, 우리나라 절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크다는 온돌방은 어디 있는지요?"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뭐하러 놔둬. 벌써 헐었지."

 

 너무나 실망스럽고 맥 빠지는 대답이다. 사실 오늘 내가 태고사까지 걸음 한 것은 5년 전쯤이었던가. <불광>이라는 불교 잡지에서 읽었던 내용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절집에서 가장 크고 긴 구들이 이곳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혹 스님께서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으신 건 아닐는지. 스님은 총총 걸음으로 범종각을 향해서 가신다. 허리가 꼿꼿하다. 백세를 바라보는 연세인데도 저렇듯 정정하시니 진정 도인임이 틀림없구나.

 

 
범종각 옆에서 바라보는 대둔산 줄기가 굵고 거침없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집들이 마치 산을 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개미 같다. 아니, 이곳에선 인간과 개미조차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굳이 구별할 필요조차 없을는지 모른다.

 

세간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대둔산 자락을 힘들게 거슬러 올라와 태고사를 찾아온다. 마음의 상쾌함을 얻으려는 건지, 제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하기야 여기에 서면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기 와서 그저 마음의 티끌 훌훌 불어 허공에 날리고 나서 내려가면 될 것을….

 

산줄기도 달리고, 마음도 거침없이 달려간다. 문득 '나는 오늘 이곳에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할! 나는 즉각 내 마음을 죽비로 몇 차례 내려친다. 헛생각하지 마라. 넌 결코 헛걸음 한 것이 아니다. 여행의 절정이 뒤바뀌었을 뿐이다. 절정의 순간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구들 없는 태고사가 오늘 여행의 절정이 아니라면 언제 절정의 순간을 지나쳐 왔는가.

 

어쩌면 오늘 내 여행의 절정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집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진산면 지방리나 두지리 근방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다. 여행이야말로 그 말에 가장 부합되는 말이 아닐까.

 

도착해봤자 별 나을 것도 없는 삶이지만

 

 
태고사를 내려온다. 절 아래까지 내려와 낙조대를 가고자 다시 산을 오른다. 여기서 낙조대까지는 약 1~2km의 거리다. 산 자락엔 눈이 깊이 쌓여 있고, 사람이 밟고 간 흔적도 드물다. 혼자 가는 산길이 약간 두렵기도 하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교감이 부족한 데서 오는 감정이다.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산과 무언의 소통을 나누면서 산을 오른다.    
 
낙조대에 올라선다. 시계가 맑아서 금산 쪽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 눈을 돌리자 대둔산 연봉과 정상이 줄지어 있다. 해발 830m상에 있는 낙조대는 해돋이 명소이자 해넘이 명소라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낙조를 볼 수 있을 시간이다. 그러나 아쉬움을 안고 이쯤에서 그냥 하산하기로 한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길에 대해 "지루한 곳과 도착해봤자 별 나을 것도 없는 곳을 잇는 땅 조각"이라고 했지만, 가야할 길이 남아 있는 한 삶이란 얼마나 희망적인가. 산너울에 잡히지 않으려고 걸음을 점점 서두른다.


태그:#대둔산 , #태고사, #도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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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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