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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이 내렸습니다. 나흘 동안 내린 눈이 무릎까지 빠집니다. 열흘 전에 내린 눈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눈은 산촌 사람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해 자꾸만 내렸습니다. 내린 눈은 얼었다 녹았다 하며 길을 빙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지간히 배포가 크지 못하고는 길을 나서기 두려운 게 요즘 산촌의 모습입니다.

 

눈 때문에 장터 못가는 어머니, 드디어 몸살났습니다

 

그런 이유로 함께 사는 어머니의 발은 20일 넘게 묶여 있습니다. 어머니는 지난 1월 2일 정선 장터에 나갔던 이후 지금까지 장날이 네 번이나 지나갔지만 읍내 구경도 못했습니다. 장날마다 폭설이 내리거나 몹시 추웠던 탓입니다.

 

어머니에게 천재지변이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체념을 하고는 있지만 장터에 나가지 못한 어머니는 요즘 몸살이 났습니다. 직접 만든 무말랭이나 호박말랭이를 빼면 딱히 팔 것도 없지만 장터 나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터라 산촌에 갇혀 있는 게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추워도 정선 장날은 돌아오고 5일장은 섭니다. 마음만 먹으면 억지로라도 장터에 나갈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아들은 길이 빙판이라는 이유를 들어 어머니의 외출을 막습니다. 점심까지 거르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팔아야 2만원도 벌지 못하는데다, 장터의 추위를 견디기엔 일흔여섯이라는 나이가 너무도 걱정스럽습니다.

 

천지에 눈이 가득하니 밖에서 할 일도 없습니다. 집 안에만 갇혀 있자니 없던 병이 생기는지 어머니는 요즘 자주 아프다고 합니다. 빨리 날이 풀려 길이 녹아야 할 텐데 눈이 오지 않으면 추위가 몰려 오니 당분간은 꼼작 없이 집에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산촌의 겨울은 할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들이나 집 안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눈이라도 없으면 이런저런 일을 찾을 수 있지만 눈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비료 포대를 타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울음소리마저 끊긴 산촌에선 이제 그런 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눈이 밀갈기라면 을매나 좋겠소"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는 아랫집 할머니입니다. 어머니보다 한 살 적은 할머니는 술 때문에 병을 얻어 아들로부터 금주령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요. 본인 스스로 내린 금주라면 참겠지만 아들이 일방적으로 내린 것이니 가능하면 어기겠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할머니는 걸어서 십 분 정도 걸리는 우리 집으로 자주 마실을 옵니다. 우리 집에 오면 술이 있기에 할머니에겐 이보다 좋은 이웃은 없는 셈입니다. 어머니도 긴긴 겨울을 입담 없이 지내기에 심심하니 친구처럼 반깁니다.

 

어쩌다 아들이 먼 길이라도 떠나는 날엔 할머니가 며칠씩 집에서 머뭅니다. 아들이라고 있어 보았자 할머니만큼 말벗이 되어 드리지 못하니 어머니에겐 할머니가 좋은 친구입니다. 

 

어머니는 군불을 잔뜩 지피고 할머니와 막걸리 한 잔씩을 나누며 긴 겨울밤을 보냅니다. 가끔 어머니의 방에선 웃음소리도 들려오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소녀들이 까르르 웃는 듯합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하고 귀동냥을 해보면 별 내용도 아닙니다. 그저 옛날 읍내까지 걸어다녔던 이야기나 먹고살게 없어 고생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아랫집 할머니는 이틀 밤을 우리 집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따라나서며 "뭔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지 원~" 합니다. 할머니가 눈길을 나서며 어머니의 말을 받습니다.

 

"그러게요. 이 눈이 차라리 밀갈기(밀가루)라면 을매나 좋겠소."

"에구, 누가 아니래요. 눈이 밀갈기만 같아도 맨두(만두) 만들어 먹으면서 겨울을 날텐데…."

"옛날 말이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진다고 했지만 요새는 그렇지도 않애요. 작년에도 애만 먹었지 번 게 없어요."

 

지난해 할머니의 농사는 적자로 끝났습니다. 아들 내외와 할머니가 허리 한 번 펼 틈도 없이 농사일을 했지만 빚만 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말대로 눈이 밀가루라도 된다면 그것으로 농한기를 풍족하게 날 수도 있겠으나 눈은 녹아 없어지는 눈일 뿐입니다.

 

눈, 마음껏 즐기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십시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만 한 올겨울, 아랫집 할머니의 푸념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눈만 마당 가득한 산촌의 집에선 장터에 나가지 못한 어머니의 한숨소리만이 더욱 깊어집니다. 

 

김치와 밀가루만 있으면 뚝딱 만들어 내는 만두는 겨울철 산촌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으나 밀가루 값이 폭등하면서 귀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올겨울 들어 집에서 만두를 빚은 기억이 없으니 밀가루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실감이 납니다.

 

마당을 서성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눈을 활용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밀가루 대용으로 쓸 수도 없고, 솜사탕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팥빙수라도 만들면 좋겠다 싶지만 산촌에 그런 재료가 있어야 말이지요.

 

혹여 눈이 필요한 분들 계시면 정선으로 오시어 다 가져가십시요. 눈 질은 아주 좋습니다. 한 입 떠먹으면 입이 아주 시원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봄 되면 눈 구경하기 힘들어집니다. 많을 때 챙겨 가십시오.

 


태그:#밀가루, #이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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