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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1시 50분경, 국회 대통합민주신당(이하 통합신당) 대표실. 10여명의 취재진이 대형 회의용 탁자 주변을 둘러싼 채 취재 준비를 하고 있고, 그 뒤편에선 손학규 대표가 자신의 책상에서 옷 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새 정부 조직개편안을 설명하고, 국회 차원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예정된 것. 우상호 통합신당 대변인이 손학규 대표가 이명박 당선인을 맞을 위치를 조정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입구에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이재정 장관은 조용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취재진의 뒷편을 가로질러 손학규 대표의 책상 쪽으로 이동했다. 이어 손 대표에게 다가가 "어려운 때, 어려운 일을 맡으셨다"고 인사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이 장관의 방문에 얼떨떨해 하던 손 대표도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곧바로 이 장관은 손 대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을 건넸다. 뒤늦게 이 장면을 발견한 카메라 기자 2~3명이 몰려와 플래시를 터뜨렸지만, 당황한 손 대표가 이 장관을 살짝 밀어내며, "이런 모습이 언론에 나오면 곤란하니까"라고 난색을 표했다.

 

이재정 장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표실을 나가 바로 옆에 위치한 김효석 원내대표실로 향했다. 당초 이 장관은 김효석 원내대표와 2시에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가, 손 대표를 불시에 방문한 것.

 

이 장관에게 인수위의 통일부 폐지 방침에 대한 견해를 2~3차례  물었지만, 이 장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재차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 질문하자, 이 장관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통일부의 공중분해... 이제 손놓고 나가라니"

 

"남북관계가 한참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시점인데… 남북 문제를 종합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효율성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부처가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지 않나.

 

작년 정상회담이나 장관급 회담 보면 알지 않나. 언제 특정 부처가 전권을 행사했나. 오히려 전체 부처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종합하고…. 전체 (통일부) 직원들이 휴가도 반납하고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는데, 이제 손 놓고 나가라면 어떻게 하나."

 

인수위는 이번 정부조직 개편안 중 통일부 폐지 방침에 대해 "남북관계 진전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돼야 하고 정보라인이나 특정 부서의 전유물보다는 전 방위적인 협력 관계가 돼서 통일을 앞당긴다는 것이 이명박 당선인의 의지"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재정 장관의 생각은 달랐다. 이 장관은 "한 부처의 문제가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런다"며 "남북문제를 이제 누가 관리해 나갈 것인가, 통일부를 없앤다고 하는데, 전략적으로도 그렇고, 정책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우리가 혼선을 초래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혼선을 막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전 부처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전 부처간에 대화를 이끌어냈다. 그게 오래 전도 아니고 바로 작년 일이다. 전 부처의 일을 통일부가 독식한 적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정부나 부처, 특정 정권의 의미로 해석될 일이 아니다."

 

이 장관은 통일부 폐지 방침에 대해 "갑갑하다" "참담한 심정"이라며 격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태까지 일한 것이 이렇게 평가받는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특히 이 장관은 인수위의 정부조직 개편안 마련 절차에 대해서도 "인수위가 (통일부) 장관의 의견을 단 한 번도 안 들었다는 것은 유감스럽다"며 "공청회는 못하더라도 장관의 얘기는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가만히 앉아서 폭탄맞은 기분"이라고 불만을 쏟아냈다.
 
이날 오전 인수위측이 "통일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외교통상부와 통합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서도 이 장관은 "(통일부가 외교통상부로) 합쳐지는 게 아니라 완전히 공중분해 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남북교류, 사회문화 협력, 공동투자 등 이런 것을 다른 부서로 가져가면 뭐가 남나.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가서 역할을 제대로 하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문제다.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들이다."

 

'동요'하는 통일부... "흔들리지 말고 일해라"

 

현직 장관이 새 정부의 조직개편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발한 것은 이 장관이 처음이다.

 

이 장관은 이날 국회를 방문한 목적에 대해 "하도 답답해서 오전에 간부회의 끝나고 신당쪽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오전 간부회의에서는 "흔들리지 말고 일해라" "통일부의 역할을 역사적·민족적 관점으로 봐야지, 어떤 한 부처의 업무로만 봐선 안된다" 등의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그러면서 통일부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고, 우려하고 있다"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통일부에 온 사람들은 자리 때문에 온 게 아니다. 일종의 사명감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아무개는 지금 중앙부처에 교육받으러 갔는데, 그 사람이 돌아오면 자리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처가 없어지는 사태가 올 수 있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이 장관은 김효석 원내대표를 만나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갔다.

 

앞서 김효석 원내대표는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의 방문을 받은 직후, 기자들과 만나 "통일부 폐지는 절대 없다"며 "그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재정 장관은 이날 오전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통일부 팀장급 이상 간부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새 정부의 조직개편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장관 이하 10여명의 당국자들이 남북관계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외교부로의 흡수통합이 가져올 문제점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 직후 기자들을 만난 이 장관은 "통일부의 폐지로 미래의 남북관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며 "뭐라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태그:#이재정 통일부장관, #대통령직 인수위, #이명박 당선인, #손학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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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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