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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프스의 융프라우요흐에 자리 잡은 얼음궁전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융프라우요흐 역에 내렸을 때부터 이상이 없었던 나의 신체는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현기증이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약간 띵했다. 그동안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느낌이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계단을 성급하게 오르다가 소위 고산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가장 괴로운 것은 호흡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마치 100m를 전력질주하고 숨이 가쁘듯이 호흡이 힘들었다. 나는 계단에서 멈춰 섰다. 딸 신영이도 같은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구토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융프라우 전망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축 늘어져서 앉아 있는 모습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의 몸이란 것은 또한 신기한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이 적응되고, 두통이 사라지고, 호흡도 정상이 되었다. 나는 다시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빙하 아래의 얼음세계가 펼쳐진다.
▲ 얼음궁전 입구. 빙하 아래의 얼음세계가 펼쳐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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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융프라우요흐의 알레치 빙하 20m 밑, 얼음으로 만든 전시장인 얼음궁전(Eispalast)이었다. 산 정상에 만들어놓은 전시장으로는 규모가 꽤 큰 얼음궁전은 내가 초등학교 어릴 때에 책에서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공간이었다. 나는 당시에 책 속의 흑백사진으로 얼음궁전을 접할 수 있었고, 알프스의 산을 파서 얼음궁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었다.

나는 어릴 적 상상의 나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장이 동그랗게 파 들어간 은빛 투명한 동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미끈하고 영롱한 바닥이 내 발 밑에 이어지고 있었다.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면에는 백색 조명이 얼음세계를 밝히며 환상의 세계를 더하고 있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에 드디어 도달한 느낌, 그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이다.

역시 가장 신이 난 것은 어린이, 신영이었다. 신영이는 사진을 찍을 때에 대부분 오른손을 들어 'V'자를 그리는데, 이곳에서는 손을 모은 채 입을 벌리고 춥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영이 사진 중 유일하게 포즈가 다른 사진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신영이는 어느 곳에서 찍은 사진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이글루와 에스키모, 물개가 조각되어 있다.
▲ 얼음궁전. 이글루와 에스키모, 물개가 조각되어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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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궁전의 녹지 않는 얼음 조각들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4000m에 가까운 산 아래라고 하지만 수천 명 관광객의 체온 속에서도 이 얼음 궁전의 얼음이 녹지 않고 일정한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궁전에는 관광객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도조절 특수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이 기계를 이용하여 이곳의 온도를 계속 영하 2℃로 유지하고 있었다.

얼음궁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이 관광객들로부터 생기는 온기는 융프라우요흐 각 식당의 난방에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유럽 선진국다운 모습이다. 걸어서 움직이는 관광객들의 온기를 어떻게 모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통로의 공기를 더 차가운 외부공기와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이용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로 얼음 조각상들이 몇 년씩 녹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얼음궁전은 1934년에 융프라우 아래 마을인 그린델발트(grindelwald)와 벵겐(Wengen) 출신의 두 산악인이 알레치(Aletsch) 빙하 아래에 굴을 파서 만든 전시공간이다. 지금도 매년 약 50cm 가량 아래로 이동하는 빙하 때문에 정기적으로 얼음궁전 지붕은 보수가 이루어진다. 빙하 아래의 얼음세상! 얼음궁전이 융프라우에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빙하 아래의 공간을 파내서 전시공간을 만드는 것은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발상이었고, 이 시대를 앞서는 안목은 지금도 이곳 1000㎡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얼음 궁전의 아치형 통로를 지나자 여러 전시실에 북극곰, 물고기, 독수리, 물개, 이글루 속 에스키모, 유빙 위의 펭귄, 유럽 연합 마크를 장식한 생쥐들이 살고 있었다. 이 예술품들은 모두 안이 시원스럽게 훤히 비치는 예쁜 속살을 가지고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 푸른 조명아래 얼음조각. 얼음으로 만든 조각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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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궁전에 어울리는 조명은 흰색이다. 흰색 조명이 흰색의 얼음세계를 더욱 환상적으로 빛나게 한다. 조금 더 걸어가니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의 얼음 조각이 자수정 보석 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마치 크리스탈로 조각된 지상의 궁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얼음 궁전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온 남녀 대학생 3명이 우리와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친구들 덕분에 얼음조각들을 배경으로 어렵지 않게 가족사진 여러 장을 남겼다. 남자 친구 2명과 함께 융프라우까지 올라온 여대생은 전문가용 DSLR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나도 사진 찍어 줄께요. 사진기 줘 봐요.”

인공 조명 속의 얼음궁전 안에는 사진기에 필요한 빛이 부족했다.

“그런데, 사진이 어둡게 나왔네요. 설정된 데로 찍었는데, 감도 설정을 더 높여야 될 것 같은데요?”
“이 친구 사진기가 안 좋아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 사이에 섞인 내 조국의 후배들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나는 16년 전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던 나의 과거를 생각했다. 나도 유럽에서 사귄 대학생 친구들과 저렇게 유쾌하게 여행을 다녔었다. 나는 그들이 참으로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푼 한 푼 아끼며 배낭여행을 하고 있을 그들을 다시 만나면 내가 시원스럽게 한 턱 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많은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방향이다.
▲ 플라토 전망대 북쪽 전경. 많은 여행자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방향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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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음궁전을 나온 후 계단을 올라 작은 고원지대에 자리한 플라토(Plateau) 전망대로 나갔다. 따뜻한 실내에서 찬바람 몰아치는 설산으로 나간 것이다. 사람들 왕래가 잦아 발 아래 눈은 녹아서 서걱거리는 곳도 있지만, 발에 밟히는 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순백색의 융프라우 설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설경의 장관은 가슴 속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했다. 고원 정상에는 십자가 형상의 스위스 국기가 온통 백색의 세상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백색 설원에서는 붉은색이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미리 고려라도 한 듯이 스위스 국기는 이곳에 잘 어울렸다.

한 스위스 아저씨가 우리 가족사진을 가로로 찍더니 다시 세로로 찍고, 스위스 국기가 잘 펄럭이는 장면을 찍는다며 다시 찍어주었다. 국기 아래에서 모든 관광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높은 알프스 아래에 펄럭이는 국기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빙하 저 멀리는 이탈리아이다.
▲ 플라토 전망대 남쪽. 빙하 저 멀리는 이탈리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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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환상적으로 구름이 걷혔던 융프라우 정상에 구름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가끔 구름이 끼었지만, 융프라우 산 아래의 모습은 잘 보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게 고산지대의 날씨인데, 이 정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 뒤에 오는 여행자들은 구름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 같다.

융프라우를 둘러싼 구름이 점점 우리를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구름은 마치 안개같이 보였지만 그것은 구름이었다. 조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름 속을 헤맬 것이다. 구름 위에 뜬 기분은 어떤 것일까? 나는 구름 속에 뜨지는 않았지만 구름 속을 걷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 #융프라우요흐, #얼음궁전, #플라토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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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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