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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봉으로 이어지는 숭인동 골목 입구.
 동망봉으로 이어지는 숭인동 골목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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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도로변에선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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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송씨. 그는 15세에 왕비에 책봉됐다.

1년 뒤 남편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이 되었고 그는 왕대비가 된다. 16세 때다. 다시 2년 뒤, 상왕이 된 남편은 복위운동에 휘말려 노산군으로, 그는 노산부인으로 강봉된다. 그 해 다시 한 번 복위운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노산군은 죽음을 맞고, 역적 죄인의 아내인 그는 관노비 신세로 전락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8세.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함께 산 기간은 불과 1년도 안 된다. 그마저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살얼음판 세월이었다. 소생조차 없었던 그는 그 뒤 64년을 더 살았다. 한많은 세월이었다. 이 때의 역적 죄인을 후세인들은 '단종', 부인을 '단종비'라 부른다.

단종비에 대해 김별아는 <영영이별 영이별>이란 소설을 통해 혼백을 위로했고, 신영복은 <나무야 나무야>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궁중에서 추방당한 그녀는 서울 교외의 초막에서 동냥과 염색업으로 한많은 생애를 마칩니다. 그녀의 통곡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합니다."

단종비가 영월로 유배간 단종을 바라보며 눈물 적셨던 언덕이 동망봉이고, 옷에 자줏물을 들이며 생을 이었던 곳이 정업원(淨業院)이다. 그 자리는 지금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다. 동망봉은 낙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영하 4~5℃ 날씨에도 아이들은 뛰어논다

골목여행은 신설동 로타리 쪽에서 시작했다. 숭인동 쪽으로 나있는 육교를 건너면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다. 겉보기엔 골목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모양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건물과 중장비 소리에 낮은 집은 모두 자취를 감췄을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12월 세 차례에 걸쳐 그 곳을 찾았다.

골목길 담벼락 그린 그림들
 골목길 담벼락 그린 그림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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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스테이트 아파트 공사장 옆으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다. '퍼주는 집'이란 식당이 먼저 맞이한다. 퍼주는 집이라…. 살짝 웃음을 머금게 된다.

길이 갑자기 좁아진다. 계단이 보인다. 뱀이 똬리를 틀듯 이리저리 몸을 꼰다. 사람이 자연과 타협하며 사는 동네에서 길은 이처럼 춤을 춘다. 면이 거친 계단은 서둘러 계단을 놓은 흔적 같기도 하고, 모양 상관하지 않는 골목 사람들의 여유 같기도 하다. 다 똑같지 않아서 하나하나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골목 끝에서 골목 끝을 본다. 골목 벽이 망원경이 되어 저 끝을 보여준다. 골목여행을 함께 다니는 후배 정래가 저 끝에 서 있었다. 한참 서 있으니 내가 망원경을 통해 정래를 보는 것인지, 정래가 망원경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인지 헷갈린다.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끼와 거북이, 다리에 걸터 앉은 아이들, 장구를 치고 태평소를 부는 악사들…. 참 다양하다. 골목사람들은 동네를 가꿀 줄 안다. '내 집'이기도 하지만, '우리 동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논다. 영하 4~5℃를 오가는 날씨에 어른들은 집 안에서 꼼짝도 않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추위를 겁내지 않는 아이들. 장난감은 빗자루와 막대기다. 정래와 사진기로 이곳저곳 찍고 있으니 아이들이 먼저 말을 건다.

"아저씨들 여기서 뭐해요? 사진 찍는 대학생이구나 그렇죠? 우리도 사진 찍어주세요."

그러곤 즉각 V자를 만든다. 참 당돌한 아이들이다. 곧이어 묻지도 않았는데, 친구 이야기를 한다. 명재라나 뭐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른에게 거리낌 없는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 조심하라"고 말해야할까. 아이들 모습을 보며 그냥 웃고 만다.

초등학교 교실만도 못한 도시 건축... 키큰 아파트는 뒷줄 가야지

양 갈래 골목길
 양 갈래 골목길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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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휘어진 골목길이 보인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폭이다. 막다른 골목 같기도 하고 통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땐 정래에게 묻는다. "뚫렸을 것 같니? 통할 것 같니?" 정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골목여행을 한 초창기엔 대부분 틀렸다. 지금은 대부분 맞춘다. 감이 생긴 것이다. 둘 사이에 펼치는 재밌는 놀이다.

동망봉을 바라보고 오르막을 오르니 어느 벽에 방향 표시를 해놓았다. 오른쪽은 낙산, 왼쪽은 동대문, 아래는 보문동이다. 우리는 동망봉을 넘어 건너편으로 가야 한다. 정래에게 "산을 넘어야 한다"고 말하니 잠시 망설이는 눈치다. 자전거가 한 대는 12.5㎏, 또 한 대는 13.2㎏다. 낮에 동묘역 근처 벼룩시장에서 먹은 파전과 오리알은 모두 소화된 상태다. 에라.

골목이 여러 줄이다. 혹시나 헷갈릴 누군가를 위해 동망봉과 이어진 길엔 표시를 해놓았다. 언덕이 꽤 가파르다. 올라갈수록 점점 시야가 넓어진다. 동대문 너머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야경이 눈부시다. 군데군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아파트가 눈을 가린다. 세상을 볼 권리는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 사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인가.

초등학교 시절 키가 큰 아이는 제일 뒤에 앉혔다. 키가 작은 아이는 앞자리에 앉았다. 공부를 잘한다고 앞자리에 앉진 않았다. 제각기 키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공평하게 볼 수 있도록 짜낸 지혜다. 가끔씩 도시 건축이 초등학교 교실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리 높은 건물이 앞자리에 버티고 있으면 뒷자리는 어쩌란 말인가.

동망봉에서 바라본 숭인동
 동망봉에서 바라본 숭인동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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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다. 단종비는 매일 이 곳에 올라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18세에 과부가 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 한 꼭지 찍었을 것이고, 불과 17세에 불귀의 넋이 된 남편 처지를 생각하며 또 눈물 흘렸을 것이고, 왕비에서 노비로 전락한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 흘렸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단종비를 불쌍히 여긴 정부가 뒤늦게 곡식을 내렸지만 끝까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배고픔까지 넘어선 자존심. 82세까지 살게 만든 힘이 아니었을까.

그는 궁에서 내쫓긴 뒤 한 때 걸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죄인이었으니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조차 벌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에 숭인동 부녀자들이 정업원에 살던 단종비에게 채소를 몰래 갖다주기 시작했다. 이는 곧 들통이 났다.

여인들은 다시 꾀를 냈다. 남자들은 들지 못하는 금남(禁男)시장인 '여인채소시장'을 만들었다. 당연히 관원은 시장을 감시할 수 없었고, 여인들은 시장이 열리는 날 몰래 단종비에게 먹을 것을 넣어줬다.

여인들의 힘. 우직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가능한 방법을 찾아낸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다.

할매국수집, 공중전화박스… 삼거리에서 보는 풍경들

동망봉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니 또 다른 골목길이 펼쳐진다. 골목길 동네서 재미있는 곳은 삼거리다. 삼거리엔 동네서 특징적인 그 무엇인가가 있다. 동묘역에서 가까운 아래쪽 삼거리엔 할매국수가 있고, 창신역에서 가까운 중턱 부근 삼거리엔 삼거리 슈퍼가 있다. 조금 더 윗길엔 공중전화박스가 있다. 양쪽으로 사람이 오가는 곳에 있는 전화박스라. 재미있다.

언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이 반짝인다. 은가루길이다. 계속 이어진다. 낯선 이를 반겨주는 골목길이라니. 반짝이는 길은 보문동쪽 방향 숭인길에 있다. 걷다 보니 '우수 골목길'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표지판을 체부동 골목길에서도 본 적이 있다.

골목동네에서 삼거리는 꽤 개성 넘치는 구역이다.
 골목동네에서 삼거리는 꽤 개성 넘치는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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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로 빠져나오니 청룡사다. 조선시대 초부터 왕실이나 종친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던 곳이다. 단종비가 단종과 이별한 후 이 절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룡사 옆(안?)엔 정업원 구기가 있다. 정업원이 있었던 터란 뜻이다.

청룡사 근처엔 사십층계길이 있다. 어딜까 싶어 찾아봤더니 꽤 긴 계단이 나온다. 확인차 오르내렸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39계단이다. 한 계단은 어디 갔을까. 그런데 왜 사십계단일까. 종로구청 도로명 부여현황에 보면 "층계가 정확히 40개이고 많은 주민이 부르고 있다"고 돼 있다.

사십층계길로 일찍이 유명세를 탄 곳이 있다. 부산시 중앙동과 동광동 사이에 있는 40계단이다. 이명세 감독이 만든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첫 장면에 나와 유명해진 곳이다.

조선 실학의 시작에서 전노협까지

숭인동에서 기억할 만한 또 다른 이름으로 우산각골이 있다. 창신3동과 숭인동5번지 일대를 우산각골이라 불렀다. 우산각골은 비우당(庇雨堂)이란 정자에서 비롯했다.

비우당은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35년 동안 정승을 지낸 유관의 집터였다. 유관은 나라에서 받는 녹을 아이들 붓·벼루 값을 대거나 동네 다리를 놓는 데 썼다. 그러니 지붕조차 고치지 못해 우산을 쓰고 비를 피했다.

그의 철학은 선조 때 판서를 지낸 이희검에게 이어졌고 다시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에게 이어졌다. 이수광은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로 <지봉유설>을 지은 이다. 청빈철학의 성지라 할 만한 비우당 표지는 창신역 4번 출구 바로 뒤 꽃밭에 있다.

숭인동 삼거리에 있는 전화박스
 숭인동 삼거리에 있는 전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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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층계길
 사십층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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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기운이 강해서였을까. 숭인동은 빈민과 노동자의 벗을 자처하며 199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단체들의 본거지였다. 재야 단일 통합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비롯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 전국노점상연합회 등이 모두 이 곳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숭인동은 또한 광복군들의 한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1992년 8월 12일자 <국민일보>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방직후에는 만주에서 돌아온 광복군들이 이승만정권과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무장해제를 강요당한 뒤 부근에 막사를 치고 임시로 기거하면서 민족지사 대접을 받지 못한 회한을 씻어 내린 유서도 이 우물에는 깃들여 있다."(우물은 '궁안우물'로 숭인동에 있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숭인동이 마음마저 가난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1999년 철거민 마을인 숭인동 내 '궁안마을' 주민들이 동내 심장병 어린이를 위해 1070만원을 모아 전달한 적이 있다. 당시 궁안마을 사람들은 천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선 실학의 거두와 백성들 마음을 안타깝게 한 비운의 왕비 그리고 중국에서 최고 신으로 추앙받는 관우의 묘가 있는 곳. 단지 집높이와 길 넓이만으로 숭인동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숭인동은 지금 강북뉴타운으로 지정돼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더 큰 변화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래도 숭인동은 숭인동이다.

숭인동 골목길에서...
 숭인동 골목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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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숭인동, #골목, #자전거, #단종비, #비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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