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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서는 경제가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그 ‘모든 것’에는 문화도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미래성장동력, 지식서비스경제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문화산업과 문화콘텐츠의 수익성과 산업적 가치를 강조했다. 진보세력을 자임하는 군소 후보 중에 문화콘텐츠보다는 문화예술 그 자체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잊지 않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모두 문화에 대한 총괄적인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문화콘텐츠산업 진흥과 문화산업 육성 우선론은 모두 경제에 문화를 포획시킨 논의다. 또한 문화공약을 문화예술 장르 자체에 대해 한정시키면, 문화는 여전히 잔여(殘餘)적이고, 다른 사안 이후의 덤에 불과해진다. 정치, 경제, 사회 뒤에 오는 부차적인 대상이 될 뿐이다. 후보자가 문화공연장에 깜짝 출연하는 이벤트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번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도 문화공약에 대한 토론은 아주 지엽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문화공약은 정치, 경제, 사회의 앞부분에 와야 한다. 문화적 삶이 인간의 특성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성장은 왜 하는가. 풍요로운 삶,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즉 문화적 삶이다. 문화는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분시켜 준다. 문화가 없다면 동물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인간다움은 문화적 가치의 향유에서 순환된다. 이는 단지 미술관이나 음악회, 연극을 몇 편 보는 생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는 한 나라의 설계도에서 DNA 같은 역할을 한다. 문화적 삶은 인문학적 성찰과 미학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삶의 성찰을 통해 좀 더 나은 개인과 가족,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모색을 의미한다. 문화강국은 단지 문화콘텐츠 강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토대가 튼튼한 나라를 의미한다. 문화예술 정책은 그것의 제도적 응집체다.

 

하지만 경제개발과 성장에 대한 비전만 넘쳐나고, 이 와중에 문화산업은 경제적인 부를 증가시키는 수단으로만 한정되었다. 문화는 돈이라는 인식을 강조하는 것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적으로 맞다고 할 수 없다. 문화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돈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객전도의 인식 속에서는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도 없다. 더구나 문화산업 성장론만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안의 분배와 형평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찾을 수 없다.

 

문화는 공공재의 성격을 지니고도 있다. 사회간접자본과 같아서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 유형, 무형의 효과를 나타낸다. 문화 인프라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 인프라는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전통문화의 정립은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사회통합이나 지향점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효과도 창출한다. 무엇보다 세계화 시대에 문화적 교류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근본 토대가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으면 문화교류 대신 종속이 일어난다. 그러나 각 후보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한류콘텐츠를 통한 수익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물론 다른 여러 나라들과 어떻게 문화적 소통을 이루어낼 것인지 각 후보들의 공약에는 드러나 있지 않다.

 

시민들은 문화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을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라도 자신들의 작품을 창작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시민은 문화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이어야 한다. 문화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책이나 문화예술인 실업급여제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문화예술정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문화적 공공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타당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문화적 향유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문화민주주의와 문화 복지를 이루는 방편이다. 하지만 단지 문화예술 작품을 소비하는 한에서만 그친다면, 온전한 문화민주주의 내지 문화 복지가 될 수 없다. 문화교육, 창작, 향유가 선순환의 고리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각 후보들은 예산 증액을 논한다. 그러나 문화 부분에 대한 예산을 얼마 정도 늘리겠다는 식의 막연한 공약보다는 그 예산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천편일률적인 예산의 배정과 집행은 소모적으로 이익단체들의 배만 불리고, 창작자나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문화적 효과는 미미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화정책이 아니라 국정의 운영과 아울러 문화비전을 제시하는 후보가 필요하다. 매번 정치논리에 문화관련 부서의 수장이 교체되거나 경제부처에 문화 관련 기관들이 끌려 다니는 상황에서는 정책의 일관성은 물론 문화비전의 성취는 더욱 어렵다. 후보들은 문화정책과 기관이 다른 여타 정책부서에 휘둘리는 상황의 타개를 논해야 한다.

 

문화는 중심이어야 한다. 백범 김구는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했다. 백범이 ‘경제적 군사적 강국이 될 수는 없어도 문화강국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단순히 문화콘텐츠 강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한다면 부총리 제도를 통해 그를 총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문화대통령이어야 한다. 하지만 각 후보들은 문화콘텐츠, 혹은 문화산업 대통령만을 자임할 뿐, 진정한 문화성찰적 대통령이 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모든 사안을 제도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문화는 정책결정자나 엘리트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삶과 생활 속에서 나온다. 사회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는 문화를 통해 처음 징조를 보인다. 그것은 사회적 지향점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정운영이나 국가의 비전 도출과도 연관된다. 문화예술은 기존 사회를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과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는 데 그 본질적인 특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산업이나 장르에 갇힌 문화예술 공약은 이러한 문화예술의 본질을 배제한다.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한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다. 이는 문화 콘텐츠 산업 면에서도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정책이나 공약은 그 자유로운 상상력과 다양성의 보장보다는 기존의 관념에 부합하는가와 상품이 될 만한 것에만 모아지고 있다. 그러한 한에서, 공약(公約)은 여전히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문화공약, #문화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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