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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 어린 내 젊은 날의 에피소드 한 토막
 
백수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걍 아니 놀진 못하리라"라는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다. 난 오랫동안 기본에 충실한 백수 생활을 해 본 사람이다. 이 나라에서 단 30분만 신호등 지키며 돌아다녀보라. 기본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실감하리니.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 일생은 고난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절, 내가 가슴에 파랗게 돋는 통증을 무릅쓰고 탐구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백자를 쓰는 백수가 아니었다. 난 '흰 백' 자에 '손 수' 자를 쓰는 그런 백수가 되고 싶었다. 깨끗한 손. 이탈리아라는 나라에선 그걸 두고 '마니 풀리테'라 한다든가.

 

아무튼 내가 사는 마을 근방에선 이름깨나 날리던 백수였다. 프랑스 시인 르네 샤르는 일찍이 "詩(시)는 인간의 끼니다"라는 영양가 한 푼어치도 없는 말을 했지만, 그 시절 내게 술은 "내 영혼의 끼니"였다. 아침이 되면 '오늘은 어디메로 가서 한 잔 걸쳐 허기진 내 영혼에다 포만감을 안겨줄거나'라는 근심 걱정과 함께 눈을 떴다. 지금 생각하면 술이 있는 곳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 '술에 의한 술을 위한 술의 나라'를 건설하기에 신명을 다 받친 보람찬 시기였다.

 

그 시절 내겐 단 일 할의 부가가치세도 공제하지 않은 채 무상으로 술을 공급해 주던 사람들이 꽤 여럿 있었다. 고은 시인의 사촌형으로 모 지방대학의 국문학과장이던 시인 한 분도 빼놓을 수 없는 나의 물주였다. 언젠가 그는 인심 쓰듯 선언했다. "안군, 너만은 언제든지 내 사무실에 무상출입 해도 좋다!" 백수에겐 마지못해 따라주는 술 몇 잔보다는 존재를 고양해주는 말이 더욱 필요한 법이라는 걸 아는 드문 현자였다.

 

언젠가는 막걸리에 칼칼한 목을 추기고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야, 고은이 많이 컸어야." 이것은 감탄인가, 질투인가? 아마도 콤플렉스겠지. 그가 지방대학 교수로 떵떵거리고 살면서 술집 구석에 앉아 시간을 부패시키는 동안 고은 시인은 이미 역사의 한 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때였다. 어쩌면 그는 그런 비아냥으로 자신의 왜소함을 감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나의 간과 위장이 부패하지 않도록 수시로 알콜의 농도를 조절해가며 소독하는 데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이다. 예의로 따지자면 당시 나에게 '일용할 술'을 공급해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게 도리겠으나 '찾아 뵙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내 뇌세포를 간질이는 바 그냥 이 글로써 감사의 염(念)에 가름하고자 한다. 진정한 백수라면 찾아볼 곳과 찾지 말아야 할 곳을 명확하게 구별할 줄 알아야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다는 인가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1985년 초겨울의 추억

 

각설, 이야기의 때는 어느 땐고 허니, 1985년 초겨울이 되겠다. 나는 국문학과장이라는 분이 재직하는 학교로 직접 그분을 찾아가기로 했다. 전날 향토사 관련 책들을 그분의 명의로 대출해달라는 부탁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거기 가면 덤으로 술도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 터.

 

시내에서 미리 몇 잔 걸치고 나서 족히 십리가 넘는 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국문학과장실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서산 넘어 '바다모텔'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교수는 보이지 않고 , 여학생 두 명만이 난로를 쬐고 앉아 있었다. 이거 오늘 술 얻어먹긴 다 글렀구나.

 

그러나 제대로 된 백수라면 본능적으로 알게 돼 있다. 가장 절망의 순간에도 어디선가 술 먹을 희망은(이걸 구찌라고도 한다) 자라고 있다는 걸. 백수의 길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기대감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백수가 되면 영원한 백수가 되는 것이다. 한순간, 내 전두엽 쪽으로부터 번쩍하고 소식이 왔다. 그래, 오늘은 이 맛으로 가는 거야. 어떤 맛이냐구?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케케묵은 맛이지.

 

여학생 가운데 한 명이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어디서 오셨어요?"
"너는 내 인생의 본질을 묻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있다가 온 방향을 묻는 것이냐?"

 

여학생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버럭 소릴 질렀다. '뭐 이런 작자가 다 있나?'라는 표정이다.


"그럼 어떻게 오셨어요?"


하하. 요 귀여운 것들. 어찌코롬 그렇게 낚싯밥을 날름날름 물어 싼디야?


"너는 지금 내 용무를 묻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타고 온 교통수단을 묻는 것이냐?"

 

이쯤 되자, 여학생들의 흥분은 꼭짓점을 이탈해 버렸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라는 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탁월한 전략이다. 슬그머니 학과장 의자에 가 앉았다. 예상한 대로 여학생들이 방방 뜨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뭔데 우리 학과장님 의자에 앉아요?"

"이게 네 학과장 의자라구? 내가 알기론 이 대학은 국립이고 국립이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이 아니냐? 편의상 네 학과장이 빌려 쓰던 것을 오늘은 주인이신 이 '국민 나으리'가 좀 앉아보는 건데 왜 떫으냐? 알아듣게 설명해주지. 네 교수가 여기 있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되면 이 의자도 가지고 가냐? 아니지? 왜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난 이와같이 들었다. 어퍼컷을 날릴 땐 연속으로 날려야 경기를 빨리 끝낼 수 있는 법이라고.


"어이, 그러지 말고 커피라도 한잔 타주시지. 자네들 학과장님 있었으면 벌써 타 줬을 텐데 말이야."
"그런 거 없어요!"

"그러지 말고 한 잔 타드리지, 그래."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사내가 끼어들었다. 전임강사쯤 돼 보였다.


"정말 커피가 떨어졌어요."
"그럼 어디 뜨거운 물이라도 한 잔 마셔볼까?"

 

내가 뜨거운 물을 마시는 동안 여학생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마지막 스쿨버스를 타려면 빨리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급한 맘을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금방 꾸민 얘기 한 토막을 늘어놓았다.


"가령, 가령 말이다. 네가 친구를 집에 데리고 갔다고 하자. 함께 식사를 하는데 넌 평상시 후다닥 밥을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평소대로 밥을 후다닥 먹고 나서 숟가락을 놓으면서 친구에게 많이 먹어라, 허면 그 친구가 '염치가 미제' 아닌 바에야 어떻게 많이 먹을 수 있겠니? 적어도 네 친구가 숟갈을 놓기 전엔 먼저 숟갈을 놓으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왈 손님 대접이란 거야. 내가 이까짓 물 마시는 데 삼십 분이 걸리겠나? 한 시간이 걸리겠나?"


우리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니 교정은 벌써 땅거미가 진주해 있었으며, 당연히 스쿨버스는 떠난 지 오래였다. 텅 빈 교정을 걸어나오면서부터 꽤나 진지하게 변해서 여러가지 얘기를 들려줬다. 아마 삶의 막연함과 문학의 부질없음,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시내에 나오자 여학생들이 스스로 술을 사겠다고 나섰다. 박카스. 내가 사랑하는 한 결코 내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 기특한 신이여. 우린 근처 생맥주집으로 가서 꽤나 많은 양의 맥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여기서 내 백수로서의 노하우를 한 가지를 털어놓을 시점에 이르렀다. 가령 겨울철에 어느 시인의 사무실에 놀러갔다 하자. "불이 참 좋군"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그때 눈치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게요, 불이 참 잘 붙었네요"라고 맞장구를 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숨은 그림 찾기'엔 젬병인 사람이다. 언어란 행간을 잘 읽어야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법이다. 그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찾아 넣으면 "(오징어 굽기에) 불이 참 좋군." 이쯤 될 것이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된다구? 오징어가 있으면 소주는 자동 아닌감? 요약허면 우리 소주 한 잔 하잔 뜻이지. 그러기에 백수는 1%의 노력과 99%의 재능으로 만들어진다고 허는 것 아냐.

 

그건 그렇고, 이제 백수도 존경받을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야 된다고 봐. 안 그래? 그러기 전엔 '사회통합'이니 '동서화합'이니 허는 말은 다 말짱 구라거든. 그날 이후, 두 여학생은 수시로 날 찾아와 막걸리를 마시며 아르바이트와 남(男)의 병역 문제를 따위를 얘기하곤 했다. 

 

사춘기, 내 여린 감성을 사로잡았던 조병화의 시

 

젊은 시절, 내게 이런 류의 치기와 이유 없는 떠돎은 비일비재했다.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조병화 시인의 <고요한 귀향>이란 시집이 눈에 띄었다. 젊은 날의 방황을 노래하는 '방황과 구원'이라는 시 한 편이 나를 아득한 옛날로 이끌어 갔다.

 

그의 시를 처음 대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도서관에서였다. 당시(唐詩)를 읽다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도서관 서가를 뒤졌다. 어느 날, 낡은 시집 한 권을 찾았다. 조병화 시인의 '추억'이라는 시가 실린 시집이었다.

 

"잊어버리자고 /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 하루 이틀 사흘 / 여름 가고 / 가을 가고 / 조개 줏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잊어버리자고 /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 하루 이틀 사흘".(시 '추억')

 

금세 외울 수 있을 만큼 짧은 시였지만, 여운은 길었다. 시 속 화자가 마치 나 자신이기라도 한 듯이 흘러가버린 사랑이 남기고 간 쓸쓸함에 도취했다. 그러나 그의 시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춘기가 물러감과 동시에 그의 시처럼 보드라운 시들도 내 시야에서 얼쩡거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만난 것이 2001년에 나온 <고요한 귀향>이란 시집이었다. 조병화 시인은 1921년생이다. 조병화 시인이 여든 살 되던 해에 펴낸 이 시집은 그의 쉰 번째 시집이다. 평생 시를 종교로 삼고 50여 년 동안 시인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것이다. 

 

먼 데까지 헤매긴 했지만 도착한 곳은

 

"방황彷徨"이라는 말이 있었지,
"사람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라는 글이 있었지
이 말과 글(파우스트)을 읽으면서
아, 얼마나 흥분을 했던가
왜 그랬었을까
사범학교 사학년 시절
"구원救援"이라는 말이 있었지,
"노력한 자는 노력한 만큼 구원을 받는다"
라는 글이 있었지.
이 말과 글(파우스트)을 읽으면서
아, 얼마나 마음이 아늑했던가
왜 그랬었을까
사범학교 사학년 시절

내 이 인생이 "방황"이었던가
"구원"이었던가
방황과 노력, 그 구원이었던가

지금 내 나이 팔십

찾은 건 무엇이고
못 찾은 건 무엇인가

방황이고 노력이고
시詩라는 이 고요한 구원.

-조병화 시 '방황과 구원' 전문

 

이 시는 자신을 구원한 것이 예수도 석가도 아닌 시라는 걸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그도 방황했고, 나도 방황했다. 그러나 그는 시에서 구원이란 걸 움켜쥐었지만, 난 세상 어느 것에서도 구원을 찾지 못했다. 시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에 일생을 걸 만큼 몰두하진 못했다. 한갓 시 따위가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길고 아득한 허무가 마음의 공동에 깊고 어둡게, 그리고 오래도록 머물다 갔다.

 

시인은 "사람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노력한 자는 노력한 만큼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에 매혹 당하지만, 난 "아무것도 흔들지 않기 위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고 경의를 표할 것도 없다"라는 르네 샤르(프랑스 시인)의 말에 동의했고, "먼 데까지 헤매노라면 도착하리라"는 로버트 크릴리의 시 한 구절에 더 끌렸다.

 

시인은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늑했다고 말하지만, 난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흘러가버린 시간을 붙잡으려는 자의 추악한 욕망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젠 내 자신이 점점 파우스트가 돼가고 있음을 느낀다. 때때로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를 바라고, 정지된 시간 속 젊은 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먼 데까지 헤매긴 했지만 도착한 곳은 다시 처음이다.

 

시를 쓰면서 시에 구원받으면서 살아온 조병화 시인이 '고요한 귀향'을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순수하다'의 반대말은 '불순하다'가 아니라 '철들다'라고 믿으면서 철들지 않으려고, 불순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태그:#조병화, #방황, #구원,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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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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