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ㄱ. 서울의 양심


- 글 : 정희수
- 펴낸곳 : 시인사(1987.10.15.)


시모음 한 권 펴낸 시인 이름을 여느 사람들이 알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 시모음 하나마저도 판이 끊어진 지 한참이라면? 인터넷새책방에서 ‘정희수’ 찾아보기를 하니 195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시인 정희수가 아닌, 1945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또다른 시인 정희수가 나옵니다.



그래 그래 그랬다 이 개새끼들아
너들이 사시장철 뱉아놓는 장애자의 개념에
우리들은 허구헌 날 세벌 주검 당했고
너들이 근엄한 얼굴로 TV 대담프로에 나와
장애자 복지, 어떻고 할 대
빈주먹 부르르 떨며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 (54쪽)


헌책방 책시렁에서 오랜만에 정희수 님 시모음 하나 만납니다. 살짝 꺼내어 요모조모 넘겨 보고 책장을 펼치고 시 몇 줄 읽다가 도로 꽂아 놓습니다. 언젠가 1954년에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서 시를 쓰던 절름발이 아저씨 정희수를 떠올려 줄 사람이 있을 테지. 언젠가 이 아저씨 시를 읽고 가슴 짠했다는 사람도 나올 수 있을 테지. 언젠가 이 아저씨 시도 ‘평론으로 삼아 줄’ 사람도 나올 테지.

ㄴ.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


- 글 : 박병태
- 펴낸곳 : 청사(1982.8.20.)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느낍니다. 사람들이 이웃을 좀더 너그러이 굽어살피거나 보듬거나 쓰다듬거나 돌보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탓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 스스로 너그러이 굽어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기 몸과 마음을 제대로 보듬거나 쓰다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기 일과 놀이를 애틋하게 돌보거나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자기부터 제 먹을거리를 곱게 가꾸지 못하는데요. 자기부터 제 일거리와 놀이거리를 살뜰히 펼치지 못하는데요. 자기부터 자기 말과 글을 올바르게 추스르지 못하는데요. 이런 판에 이웃을 볼 수 있을까요. 이런 가운데 제 식구조차 가만가만 껴안을 수 있을까요.


.. 살아 있는 한 어차피 살아야 하고, 살아 있는 한 내 한몸은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초라하고 별것 아니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라도 살고 싶다 ..  〈81쪽〉


쓸 마음을 쓰고, 쓸 시간을 쓰고, 쓸 몸을 쓸 수 있어야지 싶어요. 자기 마음을 사랑하고 아낄 때 비로소 이웃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지 싶어요. 자기를 가꾸는 데에 시간을 쓸 줄 알 때 비로소 이웃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데에 시간을 쓸 수 있지 싶어요. 자기 몸을 애틋하게 가다듬거나 갈고닦을 수 있을 때 이웃사람들 몸이 무너지고 다치는 일에 함께 아파할 수 있지 싶어요.

ㄷ. 한국의 민요


- 글쓴이 : 임동권
- 펴낸곳 : 일지사(1980.10.30.)


제가 서울에서 얹혀 지내는 홍제동 다세대주택 바로 코앞에는 20층을 웃돌지 싶은 높은 아파트가 있습니다. 이곳 홍제동에서는 가장 비싼 ㅎ아파트인데, 가만히 보니 한두 주에 한 차례씩, 아파트 경로당에서 춤노래잔치를 벌이는구나 싶습니다. 아침에 맑은 마음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노라면, 어김없이 북이며 장구며 꽹과리 소리와 함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처음, 이분들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야, 서울 도심지에서 북이며 장구며 꽹과리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니, 이곳 홍제동은 참말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무슨 노래인가 들어 보니, 한결같이 트로트 노래. 조금 한물 간 트로트 노래들뿐입니다.

 

요즘도 ㅁ이라는 방송사에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민요’, 곧 ‘백성노래’를 찾아내어 들려주고 있지 싶습니다. 시골에는 아직도 여든이나 아흔이 넘은 몸임에도 농사일을 그치지 않은 분들이 적잖이 살아 계신데, 이분들 가운데 텔레비전도 잘 안 보며 땅을 파는 분들은,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와 이웃과 동무들이 부르며 어울리던 백성노래를 몇 대목 떠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앞으로는 백성노래 역사는 끝입니다.

 

백성노래가 사라지는 동안 ‘대중노래’가 널리 온나라를 휩쓸었습니다. 백성노래와 대중노래를 견주면, 백성노래는 수백 해가 흘러도 낱말 몇 군데와 가락만 조금 바꾸거나 손볼 뿐, 거의 그대로 이어오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노래입니다. 대중노래는 길어도 한 해를 가기 어렵고 한두 달 즐겨부르다가 이내 묻혀 버립니다. 곧이어 새로운 인기노래가 나오니까요. 그러다가 몇 해쯤 지나면 ‘흘러간 가요’라 해서, 저마다 자기 젊은 날에 즐겨듣던 노래를 되새기면서 옛생각에 잠기곤 하지요.

 

대중노래에는 삶이 없습니다. 오로지 ‘남녀 사이 깊은 밤 사랑놀이’입니다. 지난날 백성노래에는 사랑도 있고 놀이도 있는 한편, 일이 있고 사회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자연도 숨쉬었습니다. 이처럼 노래에서 삶을 빼내고 껍데기만 남은 대중노래를 못마땅해 하면서 ‘민중노래(민가)’라는 노래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중노래는 군사독재 정권을 막내리게 한 뒤 자꾸자꾸 힘을 잃으며 대중노래를 닮아갑니다.

 

이리하여 이제 우리한테는 우리다움을, 우리 삶을, 우리 터전을, 우리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보듬으며 껴안는 노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버렸습니다. 우리 스스로 버린 줄 모르고, 잃은 줄 모릅니다. 입으로 흥얼거리는 가락과 노랫말은 있으나 노래가 없는 우리들입니다. <한국의 민요>는 우리 스스로 버려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만 ‘민요’가 그나마 전국 구석구석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이 모습을 애틋하게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노래가 무엇이며 노래에 담은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는 책입니다. 뭐, 앞으로는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테고, 이 책도 판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태그:#책읽기, #헌책방, #정희수, #박병태, #임동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