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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른바 '일류대학'은 더 많은 자율을 얻고 싶어한다. 특히 신입생의 선발에 있어서 무제한의 자율을 바란다. 대학이 좋은 교육을 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입시제도의 한계로 인한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발언은 그들의 사고를 대변하고 있다. '원재료가 좋아야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1. 원재료는 지금도 충분히 우수하다

 

사실 대한민국은 학력(學歷)공화국이다. 100개가 넘는 대학을 1등부터 꼴등까지 한줄로 죽 세울 수 있을만큼 대학은 서열화되어있다. 상위권 대학을 입학하면 곧 바로 인생의 성공이 보인다. 서열이 낮은 대학에 입학하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삶은 한계가 지워지곤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상위권 대학은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가기 위해서 안달을 하게 돼있다. 하지만 바로 상위권 대학의 교수들은 항상 불만이다. 심지어 서울대 신입생이 영어를 몰라서 강의가 어렵다거나, 미적분을 몰라서 강의가 어렵다고 투덜거린다.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갔는데 왜 그럴까?

 

교수들은 대학에 입시자율권이 없고, 삼불정책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고, 본고사를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양질의 신입생을 뽑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지금도 제일 선행학습과 사교육의 혜택을 많이 누린 학생들을 뽑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입생 중에 불과 몇 명만 고교등급제와 본고사의 문턱에 걸려서 낙방할 것이고, 대부분은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

 

고교등급제는 중학교나 초등학교부터 특목고 입시과외를 유발하고, 본고사도 역시 특정 학교를 목표로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투입하여 선행학습을 많이 한 학생이 선발되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 또 대학이 입시에 대한 자율권을 가질만한 자격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문제다. 지금처럼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상황에서도 틈만나면 입시부정과 편법적인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 본고사급 논술을 치르고 있다. 더 많은 자율을 주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도 대학은 충분히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가고 있다. 그것도 서열별로 줄을 서서 추려가고 있다. 원재료가 문제가 아니라 생산시스템과 생산공정 및 생산기술자의 기술력이 모자랄 뿐이다. 원재료 타령은 어불성설이다.

 

2. 너무나 형편없는 대학의 현실

 

모든 대학이 백화점식으로 학과들을 나열하고 장사에 열중한다. 특성화된 학과나 전공은 매우 희귀한 것이다. 모든 학과와 전공을 통틀어서 대학전체로 서열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결국 대학의 능력이나 역량자체가 그러한 서열에 수렴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어떤 대학은 모든 학과가 일등이고, 어떤 대학은 모든 학과가 이류 또는 삼류이다. 심지어 대학의 이름만으로 출신 학생의 값이 매겨져서 평생 넘지못할 한계가 된다. 한심한 일이다.

 

교수들의 능력도 대체로 형편없고, 연구에 대한 열의도 없으며, 강의의 테크닉도 대단히 모자란다. 자신들이 입학을 허락한 학생들이 어떤 수준의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는지도 알지를 못한다. 돈을 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교수직을 얻거나, 교수사회의 패거리즘에 의해 채용이 돼도 거의 평생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연구하고 노력할 이유도 동기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다 결국 양심까지 잃어버린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정치권에 기웃거리고, 인맥을 단단히 형성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또 특정한 전공에 관하여 교수 한사람의 권한이 너무도 막강하다. 심지어 석사나 박사학위를 하는 학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보니 아무도 부당한 일에 저항하지 못한다. 학생들에게 학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이 통한다. 평생을 든든하게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이 통한다. 누가 그들의 부당한 연구비 횡령이나 학생에 대한 성추행에 항의할 수 있겠는가?

 

교수들의 부정을 알고 양심에 따라 폭로한 사람들이 철저히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만다. 독재자도 그런 독재자가 없다. 용기를 가지고 교수의 비위사실을 폭로하거나 항의한 사람들, 교수들의 성추행을 고발한 사람들은 폭로나 고발을 곧장 후회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내 징계위원회도 교수들로 구성되고, 그들이 동료교수를 감싸거나 오히려 보호하고 만다는 것이다. 성추행교수가 방학기간동안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예들이 부지기수이다. 방학이 끝나면 곧 강의하고 학생을 평가하고 모든 권력을 회복한다. 아무런 견제장치가 없다.

 

정년보장이 없는 일부 교수들에게 재임용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도 결국 기존의 교수사회에 대한 순응도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연구실적이나 강의능력은 표면적인 구실일 뿐이다. 기성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를 골라서 재임용하고, 혁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재임용 탈락이라는 보복을 안기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교수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그들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것이다. 능력이나 열정은 부차적인 것이고, 더더욱 도덕성같은 가치는 불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서로 누구에게 줄서고, 누구와 패거리를 짓느냐가 살아남느냐 도태되는냐를 결정한다. 힘있는 패거리를 구축한 교수 한사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학생을 성추행하고도 잠시 쉬었다가 다시 다른 학생들을 추행하러 나온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부패하지 않는 일은 없다.

 

어디서 가짜 학위를 따오고 적절히 권력을 활용해서 교수자리를 얻으면, 그 다음에는 힘있는 자들과 적당히 패거리를 만들면 된다. 그러면 만사가 형통이다. 성추행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고, 연구비의 횡령도 누가 폭로하지 못한다. 심지어 논문을 표절하고, 허위로 연구데이타를 조작하여 논문을 써도 밝혀지기 어렵다.

 

이것이 한국대학의 아픈 현실이다.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두운 흑암에도 진실과 정의를 잃지않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대세가 그렇다면 몽땅 묶어서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학의 개혁이 없이는 교육의 질적 향상을 꽤할 수가 없다. 입시자율권이나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할 때이다.

 

3. 고등학교 공교육

 

대학에 비교하면 고등학교의 공교육은 매우 훌륭하다. 정부가 제시한 교육과정을 매우 성실하게 가르치고 있다. 종종 내신성적과 학생부에 대한 부정한 조작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의 교수사회에 비교하면 차라리 대단히 도덕적이다.

 

중고등학교의 교사는 대학의 교수들처럼 학생의 미래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않다. 진로를 방해하거나 도와줄 방법도 매우 제한적이다. 사실상 학생들의 노력에 의하여 미래가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교수사회의 무소불위의 권한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 통제력이 모자랄 정도이다.

 

물론 교사의 정년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어서 노력할 동기가 그리 강한 것은 아니다. 또 학부모들의 뇌물공세에 물드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학생들을 부당하게 체벌하거나 성추행하는 교사도 있다. 그러나 대학사회처럼 그들의 비행이 비호되지는 않는다. 보복이 두려워서 쉬쉬할 분위기도 아니다.

 

학생들과 학부모의 선행학습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서 사교육으로 내몬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대학의 입시제도상 문제에 따른 종속적인 변화일 뿐이다. 교사들이 능력이 모자라서 교육의 내용이 부실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때로는 유명 학원의 인기강사들을 능가하는 교사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전체 학생을 놓고 균등한 기회를 주기위해서 선행학습을 시키거나 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결과적으로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나라의 학생들에 비하여 학업성취도가 매우 우수한 편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매우 비교열위에 놓인다. 문제는 대학에 있는 것이지 고등학교의 공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비교적 훌륭한 학생들을 배출하는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대하여 대학교수들이 비판하는 것은 주제파악을 못하고 제 얼굴에 침밷는 일이다.

 

4. 결론은 대학사회의 민주화다

 

대학의 백화점식 학과나열과 서열화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복잡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이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회가 대학을 한줄로 세우고 1위 대학출신부터 선발하는 한 사실상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학별로 특성화한 교육으로 각기 차별화를 유도해 나가야 한다.

 

더더욱 시급하게 해결할 문제는 교수사회의 지독한 독재다. 실력에 무관하게 교수가 되면 학생들의 미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부터 혁파해야 한다. 교수들이 강의내용이나 연구의 방향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노예처럼 착취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어져야한다.

 

우선 지도교수제의 보완이 필요하다. 그 학교에서 그 교수가 유일한 전공이라 하더라도 학생이 교수에게 종속되지 않을 방법을 만들어야한다.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좋은 논문을 쓰더라도 지도교수의 비토앞에서 달리 대처방법이 없는 지금의 독재적 시스템을 허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의 논문지도를 지도교수가 혼자 좌우하지 못하게 막아야한다. 유사전공의 교수를 복수로 선정하여 지도교수를 학생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또 학생이 논문의 주제나 항목을 항상 변경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서 지도교수를 도중에 바꿀 수 있는 제도도 필요할 것이다. 부당한 사유로 교수가 학생의 미래를 좌우하려 한다면 학계에서 발을 붙일 수 없도록 대학외부에서의 감사도 도입돼야 한다.

 

그렇게 대학사회가 부당한 반칙과 더러운 행위를 스스로 정화할 능력이 생겼을 때 비로서 자율확대를 요구해도 설득력이 생긴다. 지금은 확실히 대학의 교수사회가 중고등학교의 교사집단보다 훨씬 도덕적으로도 저열하며, 시스템도 열악하다. 우선 자신들의 추악한 몰골을 반성하고 고친 후 더 많은 자율을 요구하는 것이 옳다.

 

성추행 교수들이 마음놓고 활보하는 교수사회, 연구비를 마음놓고 횡령하는 교수사회, 그런 비위 교수들을 징치하지 못하는 대학이 외부에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좀 더 성숙하고 민주적인 대학사회를 건설하는데 노력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더 이상 대학이 추잡한 추문의 온상이라는 소릴 듣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덧붙이는 글 | 노사모에 함께 올립니다.


#성추행 교수#교수들의 독재#교수사회#대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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