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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 말티고개.
 60년대 초 말티고개.
ⓒ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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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티재는 보은읍 쪽에서 속리산을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다. 말티재란 조선시대 법주사로 가던 세조 임금이 이곳에선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재리 저수지를 지나면 바로 고개가 시작된다. 한겨울에 눈 쌓인 이 고개를 넘어가려면 아주 아찔한 기분이 들 정도로 위태로운 고갯길이다. 아는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이 떨려서  "소주 두어 병은 먹고 넘어야 하는" 고개다.

저 사진으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마도 길의 굴곡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보다 훨씬 헐벗은 산자락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1961년 오리숲 풍경.
 1961년 오리숲 풍경.
ⓒ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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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오리숲의 모습.
 현재의 오리숲의 모습.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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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가리켜 '오리숲(5리숲)'이라고 한다. 길가엔 갈참나무 등 아름드리나무들이 맞이하고 있다. 절에 가게 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진입로가 길수록 마음이 훨씬 경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걸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속세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자정작용을 한다고나 할까.

만일 이 오리숲이 없다면 속리산이라는 이름은 명불허전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는 희미하게 나왔지만, 원본의 사진을 보면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겨울 숲을 걸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다.     

60년대 초반 법주사 추래암 전경(좌)과 현재의 추래암(2006.6)
 60년대 초반 법주사 추래암 전경(좌)과 현재의 추래암(2006.6)
ⓒ 법주사·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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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래암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을 지나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나온다. 금오선사 등 여러 고승 대덕의 부도가 서 있는 부도림 우측에 있는 바위다. 옛 사진은 마애여래의상 쪽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내가 찍은 사진은 부도림의 안쪽에서 찍은 것이다. 바위에는 '나무아미타불' 등 여러 글자가 암각돼 있다.

1939년 김복진 제작 미륵불(좌)와 1960년대 초 미륵불(우).
 1939년 김복진 제작 미륵불(좌)와 1960년대 초 미륵불(우).
ⓒ 법주사·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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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에 완공한 금동미륵대불.
 2002년 6월에 완공한 금동미륵대불.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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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경내 수정봉 아래는 금동미륵대불이 서 있다. 여러 차례 몸을 바꾼 전력이 있는 기구한 미륵대불이다.

원래 금동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 12년(776년), 진표 율사가 을 처음 조성했다고 한다. 17세기 조선의 선비 정시한은 그가 쓴 <산중일기>에서 처음 본 미륵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장쯤 되는 동주가 있었다. 여러 비어 있는 청사를 지나면서 보니 5층 각에는 8상의 부처가 있고 2층각에는 미륵불상이 있는데 높고 우장한 것이 일찍이 보지 못했던 바였다. 또 3개의 공청이 있는데 모두 불상이 있었다.

대웅전에 이르니 2층이었고 3불상이 모두 해인사의 불상보다 규모가 컸으나 다만 원광이 없었다. 다 보고 나서 부도암으로 곧장 오니 노승 천호의 나이가 84세였다. 지관과 도헌과 3인이 함께 유숙하였다. 감사하는 서찰을 써서 희천의 노비에게 붙이고 법주사에서 말을 먹이게 한 다음 유숙하고 새벽에 떠나도록 하였다. -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1686년 10월 5일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징발되었다고 한다. 1939년,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조각가 김복진(1901~1940)이 1백 척의 시멘트 미륵불 조성 불사를 맡는다. 그러나 이 불사는 김복진의 갑작스런 요절로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 시멘트 미륵불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완성된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을 허물고 청동대불로 세웠다. 그때 들어간 청동이 약 160톤가량이라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 다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시작한다. 원래 제 모습을 찾아준다는 의도였다. 개금불사는 2002년 6월에 완공되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혔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고 한다.

왜 그토록 막대한 금을 소비하며 금색을 입히는가. 부처의 피부는 황금색이며 그 금색은 염부단의 금색이라고 경전은 말한다.  대설산(大雪山)과 향취산(香醉山) 중간에 있는 염부단천이라는 시내에서 나는 사금의 색깔과 같은 금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금색상(金色相)을 입히려는 것이다.

1962년 문장대.
 1962년 문장대.
ⓒ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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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문장대.
 현재의 문장대.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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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m 높이에 있는 문장대는 천황봉 다음 가는 속리산의 제2봉이다. 철제계단을 밟고  오르면 속리산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좋은 전망처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을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운장대라고도 부른다. 문장대를 세 번만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해진다. 그만큼 절경이라는 뜻이다.

산천은 끝없이 변해간다. 세상은 옛날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어찌나 숨 가쁜지 뒤돌아 볼 여유마저 주지 않는다. 옛 법주사에 대한 몇 장의 사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법주사에서 일어난 지금의 변화가 과연 알맞은 것이었으며, 또한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법주사 풍경이 이 정도밖에 될 수 없었나를 생각한다.

개인의 사진은 이따금 들여다 보며 추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재에 대한 사진 자료는 반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 * 옛날 법주사 사진은 법주사 앞에 전시된 사진을 찍어 트리밍한 것으로 원본 이미지와는 크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태그:#법주사 , #속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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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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