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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환암을 향해서 내려간다. 벌써 어둑해진 상환석문을 지난다. 십오 년 전쯤에도 등산 겸해서 속리산 암자들을 들른 적이 있다. 이미 그때 기억을 죄다 망각 속으로 흘려보냈지만 이상하게도 상환암 풍경만은 잊히지 않는다. 상환암 앞 학소대의 아름다운 노송들이 그만큼 인상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환암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밟는다. 길 양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나그네를 곧장 암자로 이끈다. 이윽고 가장 최근에 건축한 공양간이 나타난다. 공양간 옆 바위 절벽을 바라본다. 아, 학소대 노송들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저 노송들의 멋진 자태는 정신의 반영일까.  
 
요사 앞 샘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 마신다. 산에 오르는 즐거움 가운데 생수 마시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태조의 유적을 추모하는 즐거움이 비할 데 없다
 
상환암은 탈골암 등 속리산 내 다른 암자들과 동시기인 서기 720년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길상암이라 불렀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전한다. 또한 세조가 복천암을 다녀갈 때 이곳에서도 이레 동안 머물며 기도하였는데, "태조의 유적을 추모하는 즐거움이 비할 데 없다"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상환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1625 ~ 1707)은 1686년 10월 18일과 19일, 이틀 동안을 이곳에서 묵었다. 그는 "본속리암이 천황봉 산허리에 있었다. 산세가 감싸고 있어서 비록 시원스럽게 트이지는 않았으나 깊숙하고 한적하여 거처하기에 적합하였다"라고 첫날 도착 소감을 말한다. 그의 묘사로 미뤄볼 때 본속리암이란 상환암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10월 19일치 일기를 읽으면 사실은 보다 더 확실해진다.
 
"19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아침에 산허리 이상은 목가가 눈과 같았다. 천응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식후에 절터를 둘러보니 간좌곤향으로 주세의 좌우가 다 기암으로 둘러 쌓여 있고 용호석봉이 기기하여 안산의 암석을 안은 듯하고 청룡변의 골짜기 물은 달고 차가웠다. 터가 매우 좁았으나 아담하게 감싸고 있어서 깊고 조용하므로 도인이 거처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평범한 안목으로 보아도 이 산과 이 면에서는 제일 가는 명당인 듯했다. 흠이 있다면 동남쪽이 너무 높아서 겨울에는 한낮이 되어야 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천응과 회인이 조실을 수리하고 창문과 벌어진 벽 사이를 발라주었다. 조용한 방 밝은 창가에서 홀로 앉아 책을 보니, 기분이 나는 듯하여 마치 구름 사이에 있는 듯하고 해묵은 욕심이 자연히 소멸되었다."
 
속리산의 암자를 주유하던 정시한이 가장 만족해 한 곳이 이 상환암이 아닌가 싶다. 수도처로 이름을 떨친 이곳엔 불교정화의 화신이라 일컫던 청담(淸潭) 스님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머물기도 했다.
 
 
 
정면 6칸, 측면 3칸 크기인 원통보전 안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원통보전은 본래 관세음보살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그러나  이곳엔 특이하게 석가여래를 주불로 모셨다.
 
현판의 글씨는 권상노(1879~1962)가 쓴 것이다. 그는 불교계 최고의 친일 반민족행위자이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맡은 그는 '승려 지원병에 대하야'라는 글에서 해괴망측하게도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사실을 끌어다대며 지원병에 나설 것을 독려하였다. 그리 잘 쓴 글씨도 아니건만 구태여 저 현판을 그대로 걸어둘 필요가 있을까.
 
원통보전 전면에는 1976년에 세운 삼층석탑이 서 있다. 탑에는 사천왕상이 돋을새김 돼 있다. 근래에 만든 것치고는 제법 모양을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원통보전 왼쪽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면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77년에 세운 상환암중창비이다. 천천히 비문을 읽노라니,  내용이 마치 흘러가는 나그네의 마음에 종이배를 띄운 듯 잔잔하다.
 
"(전략) 그러나 아깝고 분하여라, 1950년 6.25의 병화로 완전 소실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주추마저 알아 볼길 없던 황량한 폐허 위에, 무주공산  밤이면 달빛만이 교교하고 낮이면 산새 소리 소소함이 유심인(有心人)의 폐부를 아프게 할 뿐 아무도 언감생심 뜻을 펴지 못하던 차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1960년 11월 법주사에 일시 주석하시던 법운대선사께서 차암(此庵)의 유지를 답사하시고 남북통일과 불당건립을 지심발원하여 천일 기도를 마치시니, 지극한 원력이 헛되지 않아(후략)"-중창비에서
 
이렇게 시작된 중흥불사 결과 1963년에 이르러 원통보전과 삼성각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원통보전 지붕을 지나 학소대에 머문다.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던지 학소대는 참으로 절경이다.
 
시간에 갇히지 않는 삶을 꿈꾸며
 
원통보전 오른쪽에는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이 있다. 삼성각을 오르려면 철난간을 잡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삼성각은 사방 1칸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다.

다시 원통보전 앞마당으로 내려와 왼쪽 바위산을 바라본다. 학소대라 암벽에 뿌리를 내린 노송들이 선계의 풍경을 연출한다. 저런 절경이라면 어찌 학만 날아와 놀았겠는가. 때로는 봉황도 날아와 놀았을 법하고, 신선들도 찾아와 세상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유유자적했을 법하지 않은가.

날이 점점 저물어 간다. 몸은 쉬고 싶어하지만, 마음은 쉴 줄 모르니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이제 더는 해찰하며 들를 곳은 없다. 이제부터 법주사까지는 직행이다. 그야말로 '일초직입여래지'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나희덕 시 '속리산에서' 일부
 
어둠은 눈이 바라볼 수 있는 거리는 한정시키되, 사색의 범위는 한 없이 확장한다. 나희덕 시인의 시 '속리산에서'의 몇 구절을 생각하며 어두워 오는 산길을 걷는다. 나는 시인과 달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서둘러 "높이에 대한 선망"을 버렸다.
 
높이에 대한 선망을 버리고 나면 자신이 산속에 있던 바다 위에 떠 있든지 시간에 갇히지 않게 된다. 삶이 저절로 느려지고 느슨해진다. 어쩌면 성과 속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장소의 문제보다는 시간을 다루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모른다. 만약 스님이 시간에 얽매여 산다면 그는 이미 수행자가 아니라 저자 거리의 속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제사 아이들을 데리고 법주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이야말로 시간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세속의 시간을 버린 성(聖) 가족이다. 법주사엔 하나 둘 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지난 3일에 다녀왔습니다. 속리산 암자 이야기는 이것으로 맺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태그:#속리산 , #상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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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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