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관음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입석대.
 관음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입석대.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문장대를 나서 능선을 타고 천왕봉 쪽으로 걸어간다. 조릿대 숲 사이로 난 길이 수시로 나타나서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능선을 걷다 보니 지리산 '종주'하던 때가 생각난다. 벽소령 산장에서 삼신봉까지 가는 길은 유난히 조릿대 숲길이 많았던 것 같다.

이정표는 내가 문장대로부터 1.3km를 걸어왔노라고 말하며 능선으로부터 400m 아래에 관음암이 있다고 귀띔한다. 관음암을 들렀다가 이 능선으로 돌아오려면 왕복 800m를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꽤 갑갑해진다. 그러나 '과정의 미학'을 빼고는 산사 기행을 말할 수 없다.

산을 내려가면서 보니 입석대가 바로 코앞에 바라다보인다. 언제부터 저렇게 세워진 채로 있게 되었는지 바라볼수록 신기하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쫓겨온 신라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이 세웠다는 얘기도 있고, 임경업 장군이 세웠다는 얘기도 있다.

누군지 모르지만, 왜 구태여 누워있는 돌을 일으켜 세웠을까. 그 인위, 그 상징 조작, 그 통치 기술이 역겨울 뿐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가장 좋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입석대를 와석대로 돌려놓는, 그런 역사의 길을 가는 셈이다. 문득, 노무현이 집권한 지난 5년의 시기는 그런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명예욕에 대한 확실한 경계를 세워라

석문인 세심문.
 석문인 세심문.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얼마나 아래로 내려갔을까. 관음암으로 가는 아주 작은 푯말이 서 있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좁은 문 앞에 선다. 바위엔 '관세음보살'이라는 글자가 크게 음각돼 있다. 씻을 세, 마음 심 자를 써서 세심문이라 한다. 임경업 장군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는 운여 대사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거기엔 임경업장군과 운여 대사 사이에 얽힌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검술을 가르치기 전에 운여 대사는 "그대가 일국의 명장이 되길 원한다면 나의 지시대로 10년을 닦아야 한다"라고 임경업에게 다짐을 받는다. 그러나 검술을 배운 지 7년이 되자, 임경업은 "저의 기운이 이만하고 검술이 또한 자신 있으니 이제 세상을 평정시킬 자신이 있습니다"라며 하산하겠노라고 건방을 떤다.

그러자 임경업이 아직 명예에 대한 욕심만은 버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운여 대사는 경계의 표시로 커다란 바위를 쪼개 세심문을  만들었다. 그리곤 구름을 잡아타고  비로봉 너머로 표표히 사라져 버렸다. 이 문을 드나들며 마음의 티끌을 잘 씻으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승이 쓸 수 있는 최고의 극약 처방을 내린 셈이다. 이후 임경업은 뉘우치고, 또 뉘우치며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꼬박꼬박 지키다 생을 마쳤을까. 그 뒤야 누가 알겠는가, 더질더질.

나는 마음을 씻는다는 말을 마음을 여민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조심스럽게 석문을 지난다.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관음암

관음암 전경.
 관음암 전경.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관음전.
 관음전.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석문을 지나고 또 바위 사이를 지난 다음 돌계단을 올라가자 비로소 관음암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관음암은 관음봉(983m) 아래 있다. 관음암을 '경업대토굴'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좀 전에 얘기한 전설 때문이다.

관음암은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 회월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전설은 그가 관음암을 창건한 것이 세수 60세 때였으며 168세때 입적했다고 전한다.

<산중일기>의 저자 정시한(1625~1707)은 1686년 10월 3일, 이곳에 도착해서 이틀을 머물고 나서 10월 5일에 법주사로 내려간다.

"4일 새벽부터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가끔 맑았다. <발휘심경> 34장을 보고 상권을 마쳤으며 <독서록> 상권과 <황정경> 하권 두어 장을 보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관음사로 내려오니 혜영과 성해가 중노에 따라 와서 전송하였으며 염일이 따라 왔다가 다시 갔다. 명보가 물품을 지고 왔다가 갔다. 향로전에서 유숙하였다. 불존의 승려 법환이 이야기를 할만 하였다. 학능 일겸, 일원, 선찬이 모두 와서 보게 되었다."-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10월 4일치

관음암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곳에까지 와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나중에 통화해 보니 관음암 스님은 오전에는 불전을 지키지만 오후에는 출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정시한이 "향로전에서 유숙하였다"라고 하는 걸 보면 17C말에는 꽤나 큰 절이었던가 보다. 그러나 오늘의 관음암은 아주 작은 불전 한 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불전은 정면 3칸 정도의 크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슬레이트를 덮었다. 벽돌 아니면 콘크리트 블록 쌓아 올려서 지은 조적식 구조를 가진 건물로 보이며 외부 벽면만 석재를 마감한 게 아닌가 싶다.

현판에 '관음전'이라 쓰여 있고,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고 해서 관음암이라 했다고 하니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봉안했을 것이다. 석재로 마감한 왼쪽 1칸만을 불전으로 쓰고 새시 처리한 오른쪽 2칸은 요사로 쓰는 게 아닌가 싶다.

관음암 입구에 우뚝 선 칠층석탑.
 관음암 입구에 우뚝 선 칠층석탑.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법당 전면 마당 왼쪽 구석에는 석탑 1기가 있다. 팔각형 석탑은 높다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재질은 화강암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를 줄여 일정한 체감을 주었다. 세장한데다  매우 간략한 형태이다. 불전에 비하면 그나마 화려한 편이지만.

하기야 저토록 좁은 입구에다 석가탑같은 장중한 탑을 세우겠는가, 미륵사지 석탑 같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석탑을 세우겠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만큼의 크기가 적당한 것 같다. 저 탑은 '안분지족(安分之足)'을 아는 사람이 세운 것이다.

존재의 하찮음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조망

선암대사사리탑과 비.
 선암대사사리탑과 비.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암자 들머리에는 팔각원당형 평면의 탑신을 갖고 있는데 부도 1기가 서 있다. 하대석엔 연꽃의 모양을 조각했으며 지붕돌의 모습은 규모에 비해 약간 크게 만들어졌다. 별다른 조각은 없지만 정연한 모습이 돋보인다. 근래에 만든 것치고는 꽤 잘 만들어진 편이다.

부도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다. 탑비는 부도의 주인인 선암스님의 일대기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서기 1898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선암 스님은 해인사에서 김석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으며 1937년 이후에는 김천 직지사 선원 등에서 수행했다. 1955년 주석한 이래 37년간을 이곳에서 안거했다고 한다. 1991년, 세수 94세, 법랍 65세로 열반하기까지 금강경과 부모은중경을 주로 암송하며 수행했다고 비문은 적고 있다. 물론 시시때때로 '관세음보살'을 연호하기도 했을 테지만.

비록 신라 때 회월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이곳이 오래 동안 버려진 상태로 있었으리라는 걸 상정할 때 선암 스님이야말로 관음암의 실질적인 창건주라 불러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싶다.

누가 그랬던가. "산은 천연의 사원"이라고. 올려다 보는 경치는 바라보는 이를 외경스럽게 하고,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바라보는 이에게 존재의 하찮음과 연민을 배우게 한다. 암자 마당가에 서서 이리저리 경치를 조망한다. 이 세상이 지르는 갖가지 신음을 내려다 보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러기에 관세음보살도 이곳을 자신의 상주처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마당가에서 바라본 입석대와 천황봉.
 마당가에서 바라본 입석대와 천황봉.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법주사 쪽으로 내려다 본 풍경.
 법주사 쪽으로 내려다 본 풍경.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3일에 다녀왔습니다.

더질더질-판소리를 한 바탕을 끝내는 마지막 말.



태그:#속리산 , #관음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