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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기사회생했으나 김한로는 평생 다시 앉지 못했다.
▲ 품계석. 황희는 기사회생했으나 김한로는 평생 다시 앉지 못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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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와 김한로를 의금부에 투옥하라 명한 태종은 공조판서 정진, 형조참판 이유,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최사강, 사헌집의(司憲執義) 허규에게 명하여 김한로를 국문(鞫問)하도록  명했다.

"어리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나의 노모가 아니고 바로 처의 소행이었습니다. 부처(夫妻)가 각각 거처하였던 까닭으로 지금에 이르도록 알지 못하였습니다."
김한로는 변죽만 울리고 본질은 피해갔다.

"이것은 모두 의심스러운 단서이니 형(刑)을 가하여 문초하면 정상을 얻을 것입니다."

공조판서 정진이 보고했다.

"반드시 그와 같이 할 것은 없다. 다만 그 여자를 몰래 숨겨두고 세자를 불의한 여자에게 빠지게 한 사실과 또, 양식과 물건을 준 사실을 심문하고 가도(家道)를 바로잡지 못하여 부부가 각각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고에 이른 사실을 공초(供招) 받으라."

김한로가 조강지처를 연화동에 두고 첩과 함께 연지동에 살고 있는 사생활 문제를 압박하라는 지시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의 축첩은 평소엔 아무 문제가 없다가 사건이 터지면 명줄을 조이는 악재가 된다. 도덕성의 잣대로 이보다 좋은 호재가 없기 때문이다.

"너의 아들 김경재가 모두 토설했으니 숨기지 말라."

아들을 사랑하는 부정,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의금부 형리들이 다그치자 김한로가 사실대로 승복(承服)했다. 예상외로 쉽게 무너진 것이다. 아들의 공초를 받았다니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부인하면 아들이 임금을 농락한 셈이 되어 더 큰 벌을 받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한로의 공초를 바탕으로 형조와 대간(臺諫)에서 김한로와 황희의 죄를 청했다.

"황희의 사람됨은 나를 오랫동안 섬겨서 그가 승선(承宣) 노릇을 하였으나 나라를 속이지는 아니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자손을 위하여 세자에게 아부하고자 나의 물음에 바르게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황희의 죄는 내가 덮어두려고 하였는데 김한로의 죄로 인하여 논의하게 되었으니 다시 청하지 말도록 하라.

김경재로 하여금 돌아가서 노모를 봉양(奉養)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인정이다. 김경재는 과천의 조모 집으로 나아가도록 허락하되 타처에 출입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근신하지 않는 바가 있다면 성명(性命)이 가석(可惜)할 것이니 삼가도록 하라.

김한로의 죄는 어리석고 비루하기가 심하다. 구종수의 일이 발각되지 아니하였을 때 변계량을 증인으로 삼고서 김한로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세자가 행동하는 바에 지나침이 있다면 감히 아뢰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은 순량(順良)하였으나 그 뒤에 범한 바는 비루하였다. 김한로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죽산에 부처하라."

황희와 김한로 일을 일단락지은 태종이 별도로 김한로를 불렀다.

"의금부에서 모반(謀叛)을 공범(共犯)한 율(律)로써 너를 참형(斬刑)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불쌍히 여겨 직첩만을 거두고 죽산에 부처한다. 의금부에서 너를 나주에 귀양 보내고 너의 아들 김경재를 충청도에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으나 너는 근경(近境)에 두고 너의 아들은 조모의 집에다 두니 너는 마땅히 그리 알라."

"소인의 죄는 열 번 죽어도 마땅한데 지금 너그러운 용서를 받으니 비록 먼 지방에 귀양 가더라도 어찌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세자를 강하고 의롭게 훈육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다

김한로를 귀양 보낸 태종은 우빈객(右賓客) 변계량을 불렀다.

"김한로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숙빈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 전(殿)에 다시 들이게 하고 싶다."

"부인(婦人)은 남편 집(夫家)을 내조하므로 남편을 중하게 여깁니다. 숙빈의 정이야 어찌 세자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였겠습니까? 숙빈의 한 짓은 부도(婦道)에 합당하니 숙빈을 전(殿)에 돌아오게 함은 심히 지당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 뜻을 가지고 계달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아뢰지는 못하였습니다."

숙빈 김씨의 속 깊은 마음을 가상히 여기자는 얘기다. 지아비의 아낙으로 세자가 어리를 가까이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얼마나 속이 쓰리고 아팠겠느냐는 뜻이다. 지아비의 흠결이 드러 날까봐 그 아픔을 가슴에 삭이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숙빈을 어여삐 봐주자는 얘기다. 

"서연(書筵)의 빈객(賓客)은 누구누구인가?"

"조용·김여지·탁신과 신(臣)입니다."

"이들을 버리고 다시 구한들 이보다 나은 인재가 있겠느냐? 명나라에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지라도 본국(本國)에서 구한다면 다시 얻을 수가 없다."
세자의 스승으로 이 보다 더 나은 인물은 없으니 유임하겠다는 복안이다.

"서연을 언제부터 재개하는 것이 좋겠는가?"

"오래도록 서연(書筵)을 파하는 것은 세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세자가 허물이 있다면 더욱 강경(講經)에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속히 서연을 설치하소서."

"내가 마땅히 다시 설치하겠다. 세자에게 효우(孝友)와 온인(溫仁)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도록 하라."

"숙위사(宿衛司)의 속모치(速毛赤)를 혁파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세자전에 속모치가 있었다. 세자의 주문에 즉시 대령하기 위해서다. 속모치는 군기감에 소속된 장인으로 칼과 활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세자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태종이 군기감에서 속모치를 차출하여 세자전에 파견하고 있었다. 세자는 이들 속모치를 통하여 예술에 가까운 보검을 만들어 아첨하는 관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숙위사의 속모치는 세자에게 무익하니 이를 혁파하였다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려서 다시 세워도 가(可)할 것입니다."

강한 것을 부드럽게 전달하지 못하는 천성, 태종의 한계였다

한양에 돌아가면 세자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점검한 태종은 수창궁에 있는 세자 양녕을불렀다. 세자는 수즙하지 않은 수창궁에서 외출을 금지 당한 채 연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자는 단기(單騎)로 한경(漢京)에 돌아가라."

부왕의 시선은 싸늘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명령이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따스함이 없었다. 임금의 목소리에서 부정(父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죄인을 다루는 군신간의 준엄함만이 살아 있었다. 야속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군왕이 세자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양녕은 일국의 세자다. 차세대를 이끌어 갈 공인된 재목이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세자에게 시종 하나 붙여주지 않고 호위군사 하나 세우지 않으면서 홀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무장해제 시킨 적의 장수나 다름없었다. 폐위는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버리는구나."

부왕의 명을 받는 순간, 양녕은 형언할 수 없는 희열과 슬픔이 교차했다. 멍애로 작용했던 세자를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과 아버지와의 인연의 끈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단기로 돌아가라."

아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아버지의 이 한 마디가 결국 파국의 씨앗이 되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다던가? 태종의 강한 채찍이 결국 부러지는 원인이 되었다. 강함도 부드럽게 전달하고 부드러움도 강하게 각인시키는 용병술이 태종에게 없었다. 이것이 태종의 한계였고 천성이었다.


태그:#태종, #세자, #양녕, #단기, #김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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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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