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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서 아이들은 꿈을 꾼다.
▲ 봉통가는 길 이 길에서 아이들은 꿈을 꾼다.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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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아침녘 오는 둥 마는 둥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이제 차분히 자리를 잡았다. 서늘한 바람이 마을 회관 태극기를 가볍게 펄럭이며 굵지 않은 빗방울을 뿌린다. 학교에서 통학선(작은 섬마을 학교라 배를 타고 등교한다)에 오를 때까지는 한두 방울 떨어져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월호를 지나 전남 여수 두라도 선창에 내리자 제법 빗방울이 굵어진다. 선창 가까이 사는 녀석이 우산을 가져온다. 바다에 장어 통발을 막 뿌리고 잠깐 방파제에 올라 김치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학부모는 플라스틱 대접에 소주를 부어 권한다. 학부모는 소주를 따르고 나는 '조금만……'이라고 하지만, 학부모는 잔을 가득 가득 채웠다. 섬마을 인심이 어디 소주 한잔으로 끝나겠는가. 똑 같은 잔에 또 한 번의 소란을 피우고서야 아이가 건네주는 우산을 받아 봉통 가는 비탈길로 향했다.

돌이 바다까지 갈까?
 돌이 바다까지 갈까?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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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경사를 오르자 초등학교 아이들 넷이서 길을 간다. 봉통에 사는 녀석들이다. 6학년 2학년인 녀석 둘이 앞서고, 앞니가 둘이나 빠진 1학년 녀석 둘은 뒤에서 힘없이 걷는다. 언니들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는 바람에 기운이 빠졌나 보다. 마침 길동무가 없었는데 잘되었다.

"야, 같이 가자!"
"선생님 오늘 100까지 배웠어요."


녀석들은 요즘 하나에서 백까지 숫자 세기를 배우는 모양이다. 함께 발걸음을 세기로 했다. 이 빠진 녀석 목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시온이는 이내 다른 소리를 한다. 길가의 소가 어떻고, 나무 열매가 어떻고……. 두 녀석이 발걸음을 세면서 '백'이라는 소리를 네 번쯤하고 나니 숫자를 곧잘 센다. 시온이는 발걸음 세기를 하다가도 막히면 여전히 딴소리다. 깔깔거리며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 자랑이 한 움큼이다. 가끔 보는 중학교 선생님을 반겨 동무해주는 녀석들이 고맙다.

참 얌전한 비가 온다. 바람이 불면 우산도 필요없다.
▲ 비오는 날 참 얌전한 비가 온다. 바람이 불면 우산도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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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도에는 내가 거주할 공간이 없어 취사와 숙식을 해결할 수 없다. 공부방에 오는 날에는 아이들 집에서 저녁과 아침 식사를 함께한다. 한 학기가 지나면서 선생님 식사당번이 바뀌었다. 두라 학부모들이 공부방에 오는 선생 밥 때문에 회의를 하셨나 보다. 선생님은 궁핍한 시골 살림에 어려운 손님이다.

"선생님 식사하세요."

아이가 부른다. 찬민이와 혜원이 나, 이렇게 겸상을 하였다. 네 살인 민지는 한사코 아빠 오시면 함께 먹는다며 오지 않는다. 한상 잔뜩 차려놓고도 반찬이 없어 죄송하단다. 관사에서 혼자 먹는 밥에 비할까. 면벽 수도승처럼 혼자 밥 먹다 아이들과 얘기하며 먹는 밥이 눈물겹도록 정겹다. 배고픈 참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아뿔싸, '좋아하실지 모르겠다'며 구수한 누룽지를 한 대접 가져오신다. 가마솥에 장작 지펴 지은 누룽지를 너무도 좋아하는데 반밖에 못 먹었다.

"선생님,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도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세요."

봉통마을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건너 풍경입니다.
▲ 안개낀 봉통 앞바다 봉통마을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건너 풍경입니다.
ⓒ 김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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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통 산봉우리 마을은 여전하다. 바다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작은 통통배 몇 척이 천천히 움직인다. 배 위에선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바다에선 바람과 안개가 무섭다. 어부들은 어차피 물 위에서 하는 일이라 오늘처럼 바람 없이 비가 내리면 개의치 않는다. 그저 통발에 꿈을 담아 바다에 담그고 한참 후 고기를 건져 올린다. 한적한 섬마을 오솔길을 걷는 것이 참으로 좋다. 아이들이 새처럼 재잘거리고, 조금 큰 녀석들은 비를 피해 언덕길을 내뛰는 길, 조금 오르면 작은 섬들을 품은 바다가 훤히 보이고, 비 피할 곳 없는 소들이 마냥 울음소리를 내어 주인을 부르는 곳이 두라도 봉통 가는 길이다.

길 끝에는 작은 집들이 돌담을 둘러치고 앉아 정겨운 사람들을 품고 기다린다. 산허리에 할아버지 묘지 벌초는 이미 끝났다. 마루에 걸린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은 여전히 예전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사슴벌레, 나무열매, 바닷고기와 함께하여 서로 정겹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신나게 뛰는 손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직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마을 회관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올라오시는 동네 할머니를 만났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어라우!"
"비도 오는디 고상이 많구만요."


장작을 나르는 할아버지
 장작을 나르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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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두라도, #누룽지,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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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면서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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