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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 안내도. 소쇄원은 나이 열일곱에 정계에서 은퇴한 양산보라는 선비가 지은 곳이다. 본문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이곳은 16세기 동아시아 정치질서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담양 소쇄원 안내도. 소쇄원은 나이 열일곱에 정계에서 은퇴한 양산보라는 선비가 지은 곳이다. 본문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이곳은 16세기 동아시아 정치질서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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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에 출현한 조선-여진족-명나라의 동아시아 3각 구도는 16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센코쿠통일(전국통일) 이후 다크호스로 등장한 일본의 도전에 따라, 동아시아에는 조선-청나라-일본의 신(新) 3각 구도가 확립된다(17세기 초반).

국제정치에서만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질서 변화의 조짐은 이미 16세기 초반부터 조선 국내정치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림의 본격 등장이었다.

고려 멸망 이래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사림세력은 그간의 경제적·사회적 성장을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도전했고, 이 과정에서 사림을 배척하기 위한 정치투쟁(사화)이 특히 16세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16세기의 조선은 안으로는 사림, 밖으로는 일본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도전으로 인해 한바탕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림은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두었다. 일본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두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최강 명나라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등장을 천하에 알렸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이 안팎으로 정치질서 변화의 홍역을 겪던 이 시절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온갖 고난을 다 겪은 집안이 있다. 바로 전라도 선비 양산보(1503~1557년)와 그의 후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소쇄원의 대나무 숲.
 소쇄원의 대나무 숲.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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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는 소쇄원이라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거기에다가 바람마저 시원하여 그냥 눌러앉고 싶은 아름다운 별서(別墅)가 있다. 별서란 별장과 비슷한 것이지만, 농장이 딸려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다. 이 소쇄원의 창건자가 바로 양산보다.

1520년대 혹은 1530년대에 1차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쇄원은 정유재란 때에 불탔다가,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 때부터 중건되기 시작하여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쇄원은 양씨 집안의 별서로만 이용된 게 아니었다. 기라성 같은 당대의 선비들인 송순·임억령·김인후·기대승·고경명·김성원·정철 등이 이곳을 중심으로 교유하였을 정도로, 소쇄원은 엘리트 조선 지식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하였다.

소쇄원의 시냇물. 물 흐르는 모습이 시원하고 우렁차기만 하다. 겉으로는 유유자적을 즐기지만 속으로는 가슴 끓는 젊은 선비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까.
 소쇄원의 시냇물. 물 흐르는 모습이 시원하고 우렁차기만 하다. 겉으로는 유유자적을 즐기지만 속으로는 가슴 끓는 젊은 선비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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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쇄원을 만들었을 당시의 양산보가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20살을 전후한 시기부터 늦어도 40대 초반 이전까지 완성된 곳이다. 뭘 해도 했을, 한창 나이의 선비가 한가하게 이런 별서를 지어놓고 그야말로 유유자적을 즐긴 것이다.

양산보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애늙은이' 같은 행동을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스승이 사약을 마시고 죽는 바람에 나이 열일곱에 정계에서 밀려났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전라도 담양 출신인 양산보는 나이 열다섯(1517년)에 상경하여 당시 선비들의 우상이었던 조광조의 문하로 들어간다. 조선사회에서 학문적 스승은 곧 정치적 보스나 마찬가지였다. 개혁정치의 총지휘자 조광조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519년에 그는 조광조 세력의 출세코스였던 현량과(일종의 추천제)에 합격하여 탄탄대로의 출세 길을 보장받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곧바로 벼슬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나이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과 백그라운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양산보가 손님을 응대하던 대봉대.
 양산보가 손님을 응대하던 대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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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광조 덕분에 고속 출세했지만, 양산보는 바로 그 조광조 때문에 즉시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그 해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조광조가 귀양을 가고 그곳에서 사약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양산보 역시 벼슬길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 열일곱에 때 아닌 정계은퇴의 쓴맛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가 이미 관직에 나간 신분이었다면, 아마도 낙향 이상의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양산보가 정열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 바로 소쇄원 조영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유자적을 즐기면서 처사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40대 중반에 그에게 다시 관직의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그때는 본인이 출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열일곱 때의 충격이 그 정도로 컸던 모양이다.

사림은 사화의 풍파를 헤치고 결국 중앙권력을 획득했지만, 사화의 희생자인 양산보는 끝내 이곳 소쇄원에서 유유자적을 즐기다가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16세기 조선에서 전개된 신·구 세력의 대결과정에서 소외된 한 선비의 기구한 일생이 이곳 소쇄원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광풍각. 한쪽만 벽면이 있고 3면은 모두 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만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광풍각. 한쪽만 벽면이 있고 3면은 모두 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만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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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집안의 기구한 삶은 양산보 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차남인 양자징의 아들 양천경이 신묘사화(1591년) 때에 장살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이 집안사람 4명이 얼마 후 정유재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이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전라도가 조선군 보급지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자국이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판단에 따라, 일본은 정유재란 때에는 수륙 양면에 걸쳐 전라도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 와중에 양천경의 부인과 2남 1녀(3남 1녀이지만, 장남은 피랍 모면)가 1597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대에 붙잡히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을 생포하면 목·코·귀만 잘라 전리품으로 갖고 가거나, 아니면 부산에서 일본 상인에게 팔아넘기거나 혹은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기술자나 관료 집안 출신들이었다. 양산보의 손자며느리와 증손자들도 그런 이유에서 끌려간 것이다.

1985년에 삼영사가 펴낸 <변태섭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에 실린 이원순의 '임진·정유재란시의 조선부로노예문제-왜란 성격 일모'라는 논문에 의하면, 1592~1599년 기간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납치자는 대략 1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대대로 사화의 피해를 입은 이 집안에서 가족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가는 비극까지 맞이했으니, 저승에 있는 양산보가 이를 보았다면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쇄원도 이때에 불타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쇄원이 완전히 중건된 것은 양산보의 5대손 때에 가서의 일이다.

1597년에 일본으로 끌려간 양산보의 후손들은 제2차 회답겸쇄환사(통신사의 이전 명칭)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20년 만인 1617년(광해 9년) 10월 18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들을 억류하고 있던 와키자카가 송환을 거부하는 통에, 조선 외교관들이 막부에까지 로비를 벌여 겨우겨우 송환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송환과정에 관한 자세한 기술은 호남사학회가 2006년에 펴낸 <역사학연구> 제28집에 실린 김덕진 광주교육대 교수의 논문 ‘왜란과 소쇄원 사람들 그리고 소쇄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해양세력이 동아시아 세계에 명함을 내민 16세기 후반에 소쇄원을 거점으로 한 양산보의 후예들은 격동의 와중에 일본에까지 끌려갔다가 어렵사리 귀국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소쇄원의 정경.
 소쇄원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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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전남 담양군 소쇄원은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셨다가 열일곱 살에 정계은퇴의 비운을 맛본 양산보와,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20년 만에 귀국한 양산보 후예들의 애환과 슬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맑은 시냇물과 시원한 바람은 양씨 가문의 아픈 상처들을 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사림의 정치적 도전으로 인한 조선의 사화, 일본의 군사적 도전으로 인한 동아시아의 전쟁.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소쇄원이 지어졌다가 불타버렸고, 그런 가운데에 소쇄원 사람들은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다. 16세기 조선이 직면한 국내외적 정치질서의 변화를, 한 선비가문을 중심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소쇄원이다.


태그:#소쇄원, #양산보, #기묘사화, #정유재란,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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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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