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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지인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가르며 흐르는 이 강은 세 나라를 묶어주는 끈이자, 없어서는 안 될 젖줄입니다. 바로 몽골에서는 '하라무렌', 중국에서는 '헤이룽쟝'으로 불리는 아무르강입니다.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검은빛을 띤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먼저 지어진 이름을 후에 자기 나라 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닐진대, 이처럼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은 서로 모습과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르강은 몽골 고원과 중국 동북지방의 대평원을 적신 후 하바롭스크(Khabarovsk) 근처에서 쑹화쟝(松花江)과 우수리강 등 큰 지류들을 끌어안으면서 '세계 8대 하천'이라는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얼지만 않으면 웬만한 규모의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까지도 드나들 수 있는 내륙 수로입니다.

▲ 나나이족 마을 전경. 맨 앞으로 그들이 과거 사용했던 나무배가 전시되어 있다.
ⓒ 서부원
그 물길을 따라가며 아무르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곳 아무르강 주변에 모여 살아가는 소수민족만 십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 연해주와 국경을 넘어 중국 동북지방에 걸쳐 분포하고 있습니다. 겨울철 혹독한 추위 탓에 농경이 사실상 불가능한 열악한 조건임에도 그들이 일군 역사와 문화는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강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북동쪽으로 70여 킬로미터쯤 가면 자작나무 숲에 둘러싸인 '나나이(Nanai, 중국 이름은 허쩌(赫哲))족' 마을이 품 좋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집과 가재도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새로 꾸며놓은 전시장일 뿐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입구에는 나나이족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담한 박물관과 식당이 세워져 있고, 주변의 나무집들은 관광객들이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한 '민속촌'입니다. 나나이족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아무르 강변에 실제 흩어져 살고 있는데,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올라치면 몇몇 조잡한 수공품을 들고 와 좌판을 깔고 팔곤 합니다.

나나이족은 본디 아무르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민족이었는데...

▲ 요즘의 나나이족은 관광객들이 오면 갖가지 공예품을 들고 나와 좌판을 벌이고 판다.
ⓒ 서부원
그들은 본디 아무르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온돌과 비슷한 구조로 나무판을 엮어 만든 난방시설과 물고기 비늘을 벗겨 이어 만든 옷으로 -20℃를 넘어서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냈고, 연어, 송어를 잡기 위해 자작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신앙과 신 내림을 받은 무격(巫覡)이 마을을 다스렸던 샤머니즘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고, 화려한 문양의 중국식 옷감과 각종 화폐와 무기류를 통해 인근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고유의 말과 글이 있어 수렵과 어로로 생계를 이었을지언정 문화적으로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 마을 입구에 곰 신상 등 수호신을 세워두었는데, 나나이족의 토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 서부원
그러한 나나이족의 '당당했던' 과거를 마을과 박물관 곳곳에 남은 유물로 뽐내고 있지만, 이제는 아주 먼 옛날 전설과도 같은 얘기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의 문자는 사라졌고, 그나마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러시아 극동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만 명 가까운 나나이족 중에서 나이 많은 노인 200명 남짓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아무르강에 나가기보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아예 하바롭스크 등 인근 도회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고기 비늘로 만든 옷은 중국산 화학섬유로 대체된 지 이미 오래고, 자작나무배는 모터보트로 바뀐 채 아무르강을 누비고 다닙니다. 나아가 러시아인과의 결혼이 늘어난 탓인지 골격과 외모가 박물관에 걸린 사진 등에서 접한 옛 나나이족과는 사뭇 다릅니다.

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서양식 목조 건물이 민속촌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듣자니까 관광객들을 위한 별장으로 쓰이는 건물이랍니다. 소수 민족의 독특한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 철저히 박제화된 채 아예 '돈깨나 있는' 관광객들의 여름철 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질문명의 이름으로 소수 민족의 삶이 바뀌어 가고, 문화의 속성상 그들의 전통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의 역사와 고유한 정서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아무런 관심과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돈맛'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 [왼쪽사진] 입구에 일본어로 씌어진 표지목.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오른쪽사진] 물건을 팔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 일본인과 너무도 닮아 있다.
ⓒ 서부원
러시아 피서객을 제외하면 이곳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은 단연 일본인 단체 관광객입니다. 현재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적 뿌리가 사할린 섬과 인접한 이 주변에 살던 원주민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좌판에서 공예품을 팔고 있는 원주민의 얼굴이 일본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박물관을 안내하는 앳된 여성도 관광객들이 자신을 일본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일본어로 적힌 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고, 식당의 메뉴판에도 일본어가 병기될 만큼 일본과 가까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아무르강, 세차게 출렁이는 모습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탁 트인 아무르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아무르강은 웅장합니다. 오로지 물과 숲만 보일 뿐,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마을의 한복판을 나무로 만든 계단이 관통하고 있는데, 그 길로 곧장 내려가면 아무르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있습니다.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숲에 부딪혀 맹수의 무리가 포효하는 듯하고, 거뭇한 강물이 덮칠 듯 세차게 출렁이는 모습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듭니다. 이는 '러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대륙적 느낌도 아니고, 때 묻지 않은 환경과 풍광에서 느껴지는 이국적 정취도 아닌, 태고의 신비가 살아 숨쉬는 원시적 미감, 바로 그것입니다.

▲ 외딴 아무르강에까지 밀려드는 '미국의 힘'. 외국산 공산품이 남긴 쓰레기가 마을 곳곳에 버려져 있음이 안타깝다.
ⓒ 서부원
그 느낌은 오호츠크해(Okhock海) 너머 캄차카(Kamchatka)로부터 이곳 아무르강 하류 지역에까지 펼쳐진 화산암 띠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구멍이 송송 뚫린 까만 현무암이 강 유역을 덮고 있는 탓에 물빛조차 거뭇하고, 강가 '백(白)'사장은 차라리 '흑(黑)'사장입니다. 물결치는 흑수(黑水)에 그림자조차 담기지 않으니 신비로움을 넘어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아무르강을 따라 마을을 조금 벗어나니 이곳에 살던 옛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강 가장자리 큼지막한 현무암마다 새겨놓은 '바위그림'들입니다. 수천 년 전에 새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얼굴 모양의 가면부터 동심원, 빗살무늬 등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긴 것도 있고, 새나 매머드처럼 이곳에 살던 동물들의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도 수십 종에 이릅니다. 개중에는 새김이 마구 엉켜 있고, 위치 또한 일정치 않아 훗날 이곳저곳에서 옮겨진 듯하지만, 형태가 우리나라의 것들과 유사하여 시대를 뛰어넘어 문화적 관련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 아무르 강가 평평한 현무암에 새겨진 바위그림. 수천 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다.
ⓒ 서부원
▲ 강에 낚시 온 관광객이 매머드를 그린 바위그림 위에 분필 칠을 하며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설명은 고마웠으나, 더없이 소중한 유산이 방치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 서부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이곳에 오듯, 아직은 극소수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문화의 원류를 느껴보고자 이곳을 찾습니다. 같은 문양의 바위그림이 지천이고, 똑같지는 않지만 온돌과 유사한 난방시설도 보이며, 젓가락, 바구니 등의 생활 용구와 샤머니즘의 신앙 형태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무척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것들은 우리'만'의 특징이 아닌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정도로 보자면 그들 중에 일본 홋카이도(北海島) 지역의 전통문화와 가까운 것들도 있고, 중국 헤이룽쟝성(黑龍江省) 지역 소수 민족의 습속과 같은 것도 있으며, 우리나라의 고유 풍습에 들어맞는 것도 있습니다.

현재 '혈통'과 '민족'의 잣대로, 또 '국가'와 '국경'의 개념을 들이민 채 제 좋을 대로 해석하려니 무리가 따르는 것이지, 어쩌면 이곳에서 살았고, 또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잔잔한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는 격이요, 쓸모없이 헛심만 쓰는 꼴입니다.

단지 '물이 검다'는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표현한 강 이름이 나라마다 아무르강으로, 헤이룽쟝으로, 또 하라무렌으로 불리고, 또 서로에게 자기 식대로 부르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이곳에 남아 있는 옛 사람들의 자취가 후세인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잣대로 재단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려 유물 속에서 찾아낸 더 많은 공통점을 부각시켜 다른 나라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르강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른다

내일이면 하바롭스크 근처에서 아무르강을 건너 중국에 발을 딛게 됩니다. 고작 강 하나를 건너는 일이지만 국경을 넘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검열과 감시의 눈빛이 따를 겁니다. 강 가운데에 국경선이 그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갔을 나나이족이 지금은 한쪽은 러시아인으로, 또 다른 한쪽은 중국인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르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지만,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지는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본 아무르강은 슬프도록 까맸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것으로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연재를 마치고, 다음 편부터는 할빈(合爾濱)을 시작으로 중국 동북3성 답사기 (9)편이 이어집니다.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에서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를 다녀온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연해주, #나나미족, #아무르강, #동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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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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