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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 랭캐스터 카운티의 한 마을에서였습니다. 토요일인데 마을 체육공원에 검은 마차들이 아주 많이 모여 있더라고요. 랭캐스터 카운티는 필라델피아 인근으로 아미시(Amish)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아미시 밀집 지역인 만큼, 흔히 버기(Buggy)라고 불리는 검은 마차가 이 지역에서 다수 눈에 띄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이색적이었던 점은 공원 주차장에 그것도 승용차와 섞여서 많은 마차가 주차돼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 18세기 생활 방식을 고수하는 아미시들은 미국의 현대 사회와 '화학적' 결합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유명하잖아요. 아미시들은 실제로 한 동네, 즉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살더라도 삶의 방식이 일반 미국인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 검은색 멜빵 바지에 금발의 아미시 청년이 동네 미식축구 경기에서 상대 선수를 붙잡고 있습니다. 아미시들이 많이 사는 펜실베이니아주 랭캐스터 카운티의 한 체육공원입니다.
ⓒ 김창엽
이런 상황에서 현대 미국의 상징인 승용차와 아미시의 상징인 마차가 뒤섞여 있다시피 한 걸 보니 묘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양자 간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화학 결합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에서는 예상대로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미시 청년들이 또래의 비아미시 청년들과 어울려 미식축구에 여념이 없었던 겁니다.

검은 마차들은 물론 아미시 청년들이 타고 온 것 일테고요. 미식축구는 현대 미국의 프로 스포츠를 대표하는 운동입니다. 초당 수백만 달러인지, 수천만 달러인지 하여튼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수퍼보울 광고 하나만으로도 얘깃거리가 되잖습니까.

아무튼 미식축구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물 같은 존재인데, 아미시 청년들이 여기에 빠져있는 걸 보니까, 이들에게 바깥 세상의 유혹이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미시는 사치를 멀리하고, 정신적 안일을 거부하는 소수 개신교 종파로 현란함으로 가득한 미식축구 문화와는 어떻게 보면 극과 극인 위치에 있거든요.

미식축구를 하던 아미시 청년들이 열렬한 미식축구 팬인 것은 그들의 마차를 보고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차에 화려한 이글스 장식이 붙어 있었던 겁니다. 이글스는 필라델피아의 NFL(미식프로축구리그) 팀이잖아요.

마차에 붙어 있는 이글스 헬멧 장식은 사실 아미시가 보면 금기를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미국 사람들이 승용차에 붙이고 다니는, 자신들이 응원하는 프로구단 팀 스티커와는 차원이 다른 탓입니다.

왜냐면 아미시들은 일체의 장식, 꾸밈 이런 것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마차가 검은 색 일색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양을 넣고, 색깔을 화려하게 한다는 것은 정신적, 신앙적 퇴보 혹은 퇴락을 의미하는 겁니다.

▲ 미식축구장에 옆에 아미시 청년들이 타고 온 마차가 보입니다. 미식축구프로리그(NFL) 팀인 필라델피아 이글즈의 헬멧 문양 장식이 눈에 띕니다.
ⓒ 김창엽
아미시 사람들의 옷이 여자들은 흰색 계통, 남자들은 주로 검은 색 계통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얀 블라우스에 레이스를 다는 것은 물론 줄무늬를 넣는 것도 사치로 여길 정도니까요.

승용차는 말할 것도 없고, 텔레비전과 같은 각종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아미시 집단도 젊은이들의 변화를 막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미시들은 휴대전화 또한 대부분 금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로 보이는 아미시 소녀들이 휴대전화로 쉼 없이 대화를 하는 것도 두어 차례 목격했습니다. 아미시 어른들이 공중전화 외에는 휴대전화 사용을 여전히 거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미시 마을에는 아직도 공중전화 부스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데요, 이는 응급환자 발생 같은 비상시에만 사용한다는 게 통념입니다.

물론 아미시 청년이 미식축구에 빠지거나 아미시 소녀가 휴대전화에 열중하는 것은 '형식상으로'는 허용이 된다고 합니다. 아미시는 만 20세가 되기 전까지는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지 않는 게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아미시를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재침례교(Anabaptist)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 세례는 본인의 의사가 무시된 것이므로, 어른이 돼서 스스로 원할 때 받는 세례가 의미가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미식축구 문화에 젖어들고, 휴대전화 사용에 재미를 붙이는 것은 아미시치고는 너무 많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현대 문명, 문화의 유혹이 그만큼 강한 게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요.

아미시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아미시의 전통으로 길러져, 말 그대로 아미시 방식이 생활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컨대 너무 많이 배우는 것 또한 삶에 불필요한 '장식'이라고 여겨 학교도 보통 중학교까지만 마치고, 옷도 작업복 같은 인상을 주는 멜빵 방지 혹은 원피스만 입는 등 특유의 방식으로 길러지니까요.

▲ 오하이오주 홈스 카운티 한 일용품점 앞에 아미시의 마차가 주차돼 있습니다. 사치와 장식을 일체 거부하는 아미시 특유의 단순한 검은 색 마차입니다. 홈스 카운티는 랭캐스터 카운티와 더불어 아미시들의 미국내 양대 거주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 김창엽
아무튼 현대 문명, 문화에 젖어드는 신세대 아미시들의 등장이 앞으로 아미시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메리칸 홈리스의 눈에는 자본주의로 일컬어지는 현대 미국 사회보다는 농경에 중심을 둔 아미시 사회가 더 건강하다는 느낌이었으니까요.

현대 미국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 아미시들은 수백 년 동안 안정된 사회를 이끌어오고 있잖습니까. 둘 중 어느 쪽이 더 지속가능한 사회냐고 묻는다면,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미시 쪽을 손들어 주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거리에서 자면서 2006년 8월부터 네 계절 동안 북미지역을 쏘다닌 얘기의 한 자락입니다.아메리카 노숙 기행 본문은 미주중앙일보 인터넷(www.koreadaily.com), 김창엽 기자 스페셜 연재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아미시, #미식축구, #문명, #재침례교,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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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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