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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가 새겨진 접시.
ⓒ 문학사랑 제공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중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의 '연탄재' 전문.


2107년 여름. 한적한 경기도 산골마을에서 조그만 밭을 일구며 사는 노인이 쟁기질을 하다가 흙에 파묻혀 있던 낡은 도자기 한 점을 발견한다. 가만히 보니 거기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물건의 정체가 궁금해진 노인은 평소 호형호제하는 그 지역 대학 교수에게 찾아가 "대체 이게 뭔가"라고 묻는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당시 한국 최고의 가객(歌客)으로 불리던 신경림 시인과 도예가 김용문이 공동작업으로 만든 도자기 100점 중 하납니다. 귀한 걸 찾으셨네요. 여기 새겨진 시는 2000년대 초반 인기 있던 중견시인 안도현의 작품입니다."

인사동 대폿집, 시인 신경림과 도예가 김용문은 무얼 모의했나?

'시와 문학이 빛나던 시절은 흘러갔다'고 이야기되는 2007년. 비록 상상이지만 위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시를 아끼는 사람들에겐 유쾌하게 들릴 법하다. '문학이 힘을 가진 시대'로의 귀환. 이런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을까?

이 안타까운 의문과 바람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는 전시회가 있어 화제다. 50년 이상의 세월을 시와 함께 살아온 원로작가 신경림(72)과 거칠지만 정감 넘치는 막사발 작업으로 유명한 도예가 김용문(52)이 한국 현대시 100편을 도자기 위에 새기는 작업을 끝낸 것. 이것들은 곧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

'불로 구운 흙 위에 새겨진 한국시 100년의 역사'라 이름해도 좋을 이 작업은 애초 두 사람이 막걸리를 나누던 서울 인사동 한 대폿집에서 모의(?)됐다.

평소 신경림의 작품을 포함한 여러 시인의 시를 즐겨 읽던 김용문은 "선생님이 즐겨 읽는 시 100편을 골라주시면 그걸 도자기에 새기고 싶다"는 제의를 신 시인에게 했고, 김씨의 도예작품을 눈여겨 보아온 신경림이 이를 흔쾌히 승낙한 것.

둘의 의기가 투합하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신경림이 자신의 애송시로 뽑아준 100편의 시들은 그 스펙트럼이 깊고도 넓었다.

1930년대 세련된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필두로 식민지 조선의 시 천재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천진한 소년의 눈동자를 지녔던 윤동주의 '서시'와 죽을 때까지 자유인으로 살았던 천상병의 '귀천' 등이 도자기 위에 새겨질 준비를 갖췄다.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마친 대가(大家)만이 아니었다. 이성부의 '벼'와 김준태의 '참깨를 털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도 신경림에 의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현대시'로 지목됐고, 신인에 가까운 문태준과 김선우의 작품도 리스트에 올랐다.

▲ '시는 시도자로 다시 태어난다 전'을 함께 준비한 신경림 시인(좌)과 도예가 김용문.
ⓒ 홍성식
"100년 후쯤 농부나 어부에 의해 내 도자기가 발견된다면..."

김용문은 이 시들이 도자기로 다시 태어나는 작업에 꼬박 6개월을 매달렸다. 유난스레 습하고, 무더웠던 올 여름을 모조리 투자해 간단치 않은 작업을 완수한 것이다. 푹푹 찌는 날씨에 진땀을 흘리며 불길 사나운 가마 앞에 앉아 있었을 김용문이 웃으며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퍼포먼스 중 하나가 도자기를 수장시키거나 땅에 묻는 것이다. 앞으로 50년이나 100년 후쯤 그물질하던 어부나 삽질하던 농부에 의해 내가 만든 접시나 그릇이 발견된다는 걸 상상해볼 때면 짜릿한 기분이 든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쨌건 시인과 도예가, 두 사람이 허름한 주점에서 소박하게 맺은 약속은 결실을 맺었다. 그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건 오는 9월 5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 이화'에서다. 이름하여 '시는 시도자로 다시 태어난다전(展)'.

오후 5시에 시작될 개막식에는 원로시인 민영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등이 참석해 시 낭송 등의 행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전시된 작품은 인터넷 경매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을 통해 구입도 가능하다.

28일, 전시회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신경림 시인과 김용문은 "나는 시를 골라준 것 외에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박수는 여름 내내 고생한 김용문씨가 받아야 한다", "신경림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작업이었다. 감사드린다"는 말로 서로를 격려했다.

▲ 백석 시인의 시가 새겨진 도자기.
ⓒ 문학사랑 제공


신경림 시인과 도예가 김용문은...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신경림 시인은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농촌 서정의 민중적 복원과 핍박받는 이들에 대한 가없는 애정을 바탕으로 씌어진 신경림의 시들은 한국문학의 한 산맥으로 우뚝하다. <농무> <가난한 사랑 노래> <길> 등 다수의 시집을 냈다.

도예가 김용문은 1955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나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1982년 뉴코아미술관에서의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30여 회에 이르는 개인전를 열었다. 독특한 '막사발 작업'으로 미술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가로 현재 '세계막사발 장작가마축제' 조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전시관련 문의: 02)720-7703(갤러리 이화)


태그:#신경림, #김용문, #시,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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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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